『나는 엄마가 힘들다』를 읽고
‘나는 엄마가 힘들다’는 딸들이 엄마와 어긋난 관계를 돌아보며 인터뷰를 한 책이다. 인터뷰이 중 한 명은 ‘엄마가 학교, 수험공부 모두 엄마 마음대로 정했기 때문에 싫으면서도 그 과정이 즐겁기는 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엄마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을 느낀다’라고 말한다. 또 다른 인터뷰이는 ‘엄마는 딸을 통해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며 엄마들이 딸에게 자아를 의탁하는 점’을 꼬집었다. 처음 책 제목을 읽었을 때는 엄마들이 엄마로서 살아가기 힘듦을 고백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반대로 딸들이 엄마에게서 딸로 살아가기 힘든 이유를 쓴 책이었다. 내용은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지만 엄마로서 살기 힘든 것과 딸로서 살기 힘든 것은 같은 맥락 속에 놓여있다. 엄마에게는 모성 이데올로기가 강조되고 딸에게는 딸 다운 것이 강조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모성 신화는 찬양되면서 정작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맘충’ 소리를 듣고, 딸은 아들처럼 철딱서니 없이 굴어서는 안 되며 조신하고, 친절하고, 엄마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엄마와 딸에게 요구되는 모습들은 모두 여성혐오로서 맥락을 같이 한다.
엄마는 모성 이데올로기를 깊숙이 체화하고 있다. 모성 이데올로기란 어머니가 자녀 양육에 적합한 자이고, 자녀 양육에 일차적 책임이 있으며 돌봄과 안정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신념이다. 모성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모습을 가진다. 일하면서 아이를 돌보기보다는 집에서 아이만을 돌보는 엄마가, 몸이 좀 피곤해도 모유를 꼭 먹이고 자는 엄마가, 아이의 교육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좋은 대학에 보내는 엄마가 모성 이데올로기 속에서 바람직한 엄마다. 사람들은 엄마의 모습을 끊임없이 재단하고 평가하며 본인들이 정해 놓은 이상향에 맞추고자 한다. 예를 들어, 방송인 박지윤은 MBC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나와 “난 체력이 돼서 남편과 아이를 챙기느라 밤을 잘 새운다.”라고 말했으며 출산 후 27일 만에 방송에 복귀했다. 사람의 체력에 따라 출산 후 회복기간이 다르고, 아이를 맡길 사람의 유무에 따라서도 복귀가 빨라질 수도 늦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박지윤의 빠른 복귀를 두고 누군가는 “(박지윤처럼) 빨리 복귀할 수도 있는데 여자들이 괜히 더 쉬는 거다”라고 말했으며, 누군가는 “(일하는 엄마라) 집에 있는 애들이 불쌍하다”라고 말했다. 박지윤은 물론, 그 댓글을 보는 다른 엄마들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정말 출산 후 몸조리가 오래 걸려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괜히 꾀병을 부리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일을 하고 있다면 엄마 손을 타지 못한 채 아이를 키우는 것 같아 자책하게 된다. 회사에 다니는 여성이 육아휴직을 쓰면 폄하가 뒤따른다. 승진 심사 시 차별받을 것을 감안해야 하며 “누가 아기 많이 낳으래? 본인이 선택한 거잖아”, “그래도 나와서 고생한 사람이 우선이지”와 같이 육아 휴직을 남들 일할 때 쉬는 것 정도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아이를 낳았으면 차라리 회사 일을 방해하지 말고 집에서 아이나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는 엄마가 집에서 아이에게만 헌신하는 것을 바람직한 모성으로 제시하고 평가하면서 그렇지 못한 엄마를 죄인으로 만든다.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딸아이의 엄마가 학부모 모임에 참석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자녀분의 좋은 점을 하나씩 말해주세요”라고 하자 남자아이의 어머니는 “전부 다 좋다”라고 말했고, 딸을 키우는 어머니는 딸의 단점을 살짝 털어놓고 “그래도 좋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육아정책연구소의 조사 결과를 따르면,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점이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데 아들은 ‘사회성’이 뛰어나길 바라고 딸은 ‘외모’가 뛰어나길 바랬다. 엄마는 딸과 아들을 다르게 바라보고 각자에게 다른 것을 바란다. 딸은 어릴 때부터 다리를 모으고 앉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항상 조신하고 친절하고 얌전하게 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들이 싸우고 들어오는 것은 ‘남자아이들 싸우면서 큰다’고 하면서도 딸이 싸우고 오면 얼굴에 상처라도 하나 났을까 전전긍긍하며 치고받고 싸우지 말라며 다그친다. 딸이 조금이라도 여자답지 못하거나 여성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엄마는 딸의 머리를 길러주고 치마를 입히고 유아용 화장품을 사주며 딸의 꾸밈 노동을 적극 지원한다. 긴 머리, 치마는 아이의 활동을 불편하게 하고 딸들은 자연스럽게 수동적인 자세를 습득하게 된다. 딸들이 크면 엄마는 ‘친구 같은 딸’을 원한다. 남자 형제가 있는 친구들을 보면 딸인 친구들은 엄마한테 전화도 자주 하고 같이 놀러도 다니고 엄마를 신경 쓰는 반면, 친구들에게 “너 동생 (혹은 오빠)은 (엄마한테) 뭐해?”라고 물어보면 남자 형제들은 별로 엄마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아들의 모습에 “아들 키워봐야 소용없다.”며 아들의 행동에 불만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엄마 얘기를 안 들어줘도 ‘아들은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는 엄마들이 많다. 반면 딸들은 엄마 얘기를 안 들어줄 수가 없다. ‘잘 키운 딸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열 아들 부럽지 않을 만큼 효도를 해야 하고 ‘잘 키운 딸 하나’가 되기를 포기하면 ‘딸 답지 못하게 엄마를 내버려 둔다’는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엄마가 딸과 아들을 대하는 모습이나 딸과 아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다른 이유는 여성으로서 모성 이데올로기 등의 여성혐오를 답습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엄마 역시 과거에는 누군가의 딸이었고 사회적으로 여성으로 패싱 된다. 수동적인 자세,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뛰어난 공감 능력, 감정적인 태도 등을 비롯해 당연히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현모양처이자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을 교육받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딸에게도 자신이 배운 것과 똑같은 것을 가르치게 되고 딸과의 관계 역시 지나치게 의존적이고 자아 의탁적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엄마와 딸이 이런 관계를 맺는 동안 아빠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성들이 모성 이데올로기를 배우는 동안 남성들은 부성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 네이버에 ‘모성’을 검색하면 지식백과에 뜻이 명확히 명시되어 있지만, ‘부성’을 검색하면 뜻이 명확하게 기재되어있지도 않을뿐더러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부성1동’이 가장 먼저 뜬다. 사회적으로 정의된 부성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부터 아빠는 바깥일을 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 가정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책에서도 ‘부성의 개념이 단 한 번도 일본에 뿌리내린 적이 없다며, ‘부성의 붕괴’라고 얘기하는데 원래 그런 개념이 없었다’고 언급한다. 일본과 유사한 사회적 분위기를 가진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책 속 한 인터뷰이는 ‘엄마는 신경이 예민했지만 아빠는 온화해서 아빠를 좋아했다’고 말하며 ‘아빠와는 원래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마치 남자아이들이 덜렁거리고 물건을 잃어버려도 ‘남자 애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용인하는 것처럼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한 아빠에게도 일종의 용서가 적용되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아빠니까 꼰대일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 이야기를 한 인터뷰이의 아빠가 온화할 수 있었던 것도 엄마가 남자의 기를 세워줘야 한다고 교육받아 아빠에게 열심히 내조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예민한 사람, 아빠는 다정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말이 안 통해서 아빠를 싫어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아빠에게 바라는 이상적인 부성이 없으니 이런 아버지도, 저런 아버지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또한 엄마와 딸의 관계가 일그러질 동안 아빠의 역할도 없다. 오히려 한 발 떨어져서 어머니와 딸에게 무관심하는 게 아빠의 역할처럼 여겨진다.
엄마와 딸의 관계나 가정에서 배제된 아빠를 불쌍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엄마랑 자식들이 끈끈한 유대를 만드는 동안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오느라 아이의 사랑도 받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아빠를 마냥 불쌍하게만 여길 수는 없다. 최근에는 ‘워킹맘’이 많아졌는데, 엄마들은 일을 하면서 아이를 완벽하게 키우기 위해 더 바빠졌다. 그동안 아빠들은 퇴근하고 아이와 잠시 놀아주고, 주말에 아이와 교외로 놀러 가는 정도로 자신을 훌륭한 아빠라고 생각하고 있다. 엄마는 출근시간을 늦춰가며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거나 육아휴직으로 인해 승진에서 밀려가며 아이를 돌보았다. 자연스럽게 아이는 엄마와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주양육자인 엄마와 더 깊은 애정관계를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아이를 아내와 공동 육아하는 남편은 가정에서 배제될 일이 없다. 어머니에게 강요된 모성 이데올로기로 인해서 아이를 육아하지 않는 아빠가 아이에게 외면당한 것이기에 그런 아빠는 가정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가정을 등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책의 주저자는 남성으로, 여성의 경험을 알지 못하고 엄마와 딸의 관계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녀관계 문제에 남성의 시각이 필요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으나 책을 읽어보면 남성의 입장에서 엄마, 딸, 여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인터뷰이에게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해준다는 인터뷰이의 말에 질문자(주저자)는 “아아 좋지 않습니까? 엄마의 특권이군요. 아빠는 그런 말을 듣기가 힘들어요.”라고 말한다. 엄마의 입장에서 ‘사랑해요’라는 말을 듣는 것은 당연히 기분이 좋은 일이지만 ‘엄마의 특권’이라는 말은 남성인 질문자가 해서는 안된다. 엄마가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건 엄마가 아이의 주양육자로서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아빠가 그런 말을 듣지 못하는 건 직장에 다니며 아이를 같이 양육하기보다는 엄마를 돕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질문자는 왜 마가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고 아빠는 들을 수 없게 되었는지 모성 이데올로기가 만든 상황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는 말을 뱉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아이돌에 빠지거나 반려동물을 애지중지하는 것을 모성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해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이가 엄마의 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시기에는 모성을 한껏 발휘하며 헌신했지만 그런 시기를 벗어나면 남는 모성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여성이 아이나 가정에 자신의 헌신을 쏟아붓지 않고 다른 무언가에 애정을 쏟아붓는 것을 모성이라고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애초에 모성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허상에 불과한 것인데 사람이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주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저에 있는 감정을 ‘모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혐오의 일종이다. 여성이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양의 모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모성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을 비정상으로 만든다. 질문자는 모녀관계에 바람직한 남성의 시각을 제시하려면 모성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왜 남성들이 모녀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어떤 딸은 이 책을 읽고 엄마에게 느끼던 죄책감, 불안감, 고마움이라는 복합적 감정의 원인을 찾았을 것이다. 지금 엄마와 관계를 이어가기가 힘들다면 잠시 거리를 두고 엄마를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또 엄마가 자신의 자존감을 깎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주무르고자 한다면 당당히 “그건 엄마가 원하는 거야”를 외치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유를 모른 채 복잡한 감정을 겪던 많은 딸들이 이 책을 통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으며 엄마랑 좀 떨어져도 되는 이유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이기적인 마음으로 학대 수준의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모든 것을 엄마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한다.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엄마를 두둔하고 싶지는 않지만 엄마는 그것이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이라고 배웠고, 엄마 역시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의 피해자다. 딸보다는 엄마가 이 책을 읽어서, 딸들이 모녀관계의 문제를 발견하기 전에 엄마들이 먼저 자신의 행위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