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랑 Mar 06. 2020

넌 중국에서 왔지?

한 달 반동안 겪은 어찌보면 심심한 인종차별

내가 글을 쓸 때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정리하고 싶을 때. 특히 머릿속, 마음속에 떠다니는 감정을 글로 다 뱉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오늘은 기억하고 싶은 일상이 아니라, 감정을 정리하는 글을 써보려고 한다.


처음 기분이 찝찝했던 건 'Intercultural topics'라는 수업을 들을 때였다. 이 수업에서는 각각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끼리 팀을 이뤄서 과제를 해야 한다. 첫날 사정이 있어서 이 수업을 가지 못했고, 두 번째 시간에 갔더니 이미 팀이 짜져 있었다. 교수님은 나를 이미 짜져 있는 팀에 넣어야 했고 같은 나라의 학생 즉, 한국인이 없는 팀에 나를 넣으려고 하셨다. 한 팀에다가 "너네 팀에 한국인 없지?"라고 물었더니 한 친구가 "중국인 있어요!"라고 외쳤다. 다행히 교수님이 바로 "둘은 달라."라고 하셨고, 그 친구는 바로 "알아요."라고 답했다. "중국인 있어요"라고 답한 기저에 깔린 생각은 무지에서 나온 혐오다.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계를 싸잡아서 하나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 친구는 텍사스에서 온 멕시코인이었다.(심지어 일주일 간의 프랑스어 수업 동안 같은 반에서 수업을 했다.) 너를 두고 멕시코 사람 있냐는 질문에 "브라질 사람 있어요"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지 물어보고 싶다.


경영대 수업이라 그런지 역시나 팀플이 많다. 한 수업에서 자율적으로 팀플을 짜야했고, 원래 알고 지냈던 한국, 중국, 타이완 친구와 함께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인원이 조금 부족했다. 그때 한 친구가 우리에게 다가와 빈자리가 있냐고 물었다. 그렇게 팀에 합류하게 되었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수업을 들으면서 필기를 할 때, 영어랑 한국어를 섞어서 한다. 내 노트북에 떠 있는 한국어를 보더니 그 친구가 "이건 중국어야, 일본어야?"라고 물었다. "이건 한국어야."라고 답했더니 "Oh.. Sorry.. I didn't mean.."이라고 말 끝을 흐렸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듣긴 했지만 남은 수업 내내 그 생각만 났고,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그 친구는 이란 사람이었고, 한국어는 처음 보는 언어인 거 당연히 이해한다. 나도 이란어 모르니까. 근데 모르는 언어고 궁금하면 "이건 어느 나라 언어야?"라고 물어봐야 하는 거다. 왜 굳이 아는 척을 하려고 드는지 모르겠다. 너네 나라 언어 보고 "터키어야, 아랍어야?"라고 물으면 과연 기분이 좋을까. 동양에 중국과 일본만 있는 줄 아는 무식함이 지겹다. 게다가 Korea라고 하면 바로 안다. 동양에 다른 나라도 있다는 걸 알고도 그러는 거다.


또다시 팀플이다. 앞서 말한 intercultural topics 수업에서 팀이 바뀌었다. 프랑스, 미국, 우루과이에서 온 친구들과 같은 조가 되었다. 오늘 오전 10시에 모여서 팀플을 함께 하기로 했다. 다른 두 명이 늦어서 프랑스 친구랑 둘이 얘기를 하게 되었다. 나도 영어가 어렵고, 그 친구도 영어가 어려워서 영어에 대한 고충을 토로했다. 그러던 중 나보고 "중국어를 써?"라고 물었다. 하...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어를 써."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더 가관이다.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어? 읽지는 못해도 알아듣는 다던지?" "둘은 아주 다른 언어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라고 답했더니, 아주 신기한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해지기 위한 질문이었다고 쳐도 이미 내 기분은 상했다.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정확히 무슨 언어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예전에 JTBC예능인 '비정상회담'에서 이탈리아 사람이랑 포르투갈 사람인가.. 각자의 언어로 대화를 이어나갔던 적이 있다. 유럽에는 그런 경우가 있으니 물어본 거겠지만, 본인이 프랑스어를 쓴다고 해서 내가 "독일어 알아들어?"라고 묻지는 않는다. 한국어 쓴다는데 그게 왜 궁금한 지 알 수가 없다. 호기심을 빙자한 무례한 질문이었다.


오늘은 두 방을 맞았다. 카페에 모여 앉아서 팀플을 열심히 하고 중간중간 잡담도 나누고 있었다. 묘하게 나를 배척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내가 낯을 워낙 가리고 자격지심일 수도 있으니 이건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근데 미국에서 온 친구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너 중국에서 왔지?"라고 물었다. 정말 지겹다. "아니 나 한국인이야."라고 했더니 옆에 있던 우루과이 친구가 너 말실수했다는 식의 제스처를 보여왔다. 하지만 사과는 없었다. 대신 "나 어릴 때 한국에 살았었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주 어릴 때라 기억은 안 나지만 자기의 금발을 한국인들이 자주 쓰다듬었다고 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부모님이 한국음식을 종종 해주셔서, 불고기랑 갈비를 좋아한다고 까지 했다. 한국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는 것이다. 동양인의 얼굴을 보면 한국을 떠올릴 법도 한데, 중국을 떠올렸다. 영어가 모국어라 잘하니까 거의 팀장 노릇을 하고 있어서 고맙고 미안하기까지 했었는데,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다양한 나라 친구들을 사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굳이 이렇게 무식하고 무지한 애들을 사귀어서 뭐하나 싶은 마음까지 생긴다.


4시간 동안 팀플을 하며 영어로 듣고 말하고, 이런 말들까지 듣고 오니 진이 다 빠졌다. 더러워진 기분은 좀처럼 나아질 생각을 안 했다. 설상가상으로 벨기에 내 코로나 확진자가 25명이 되었다는 알림이 왔다. 밑으로 내렸더니, 버스에서 한 남성 무리가 아시아계 여성에게 '코로나'라고 외쳤고 여성이 항의하자 남성들이 폭행을 했다는 내용과 더불어 가능하면 이런 자리를 빠르게 벗어나라는 대사관의 글이 있었다. 못된 놈들은 걔네인데 왜 나보고 조심하라는 건지 열이 받았지만, 이거 말고는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아서 더 답답해졌다. 궁금해서 구글에 'belgium corona'를 쳐서 기사를 읽었더니, 벨기에 내 코로나 확진자가 50명이고 브뤼셀 내 확진자는 2명이라고 한다. 한 명은 이탈리아에 여행 갔다가 감염이 되었고, 한 명은 벨기에 내 감염이라고 한다. 이 조그만 나라에 50명이라니.. 타지에서 코로나 걸릴까 봐 걱정도 되고, 인종차별도 무섭고 참 엎친데 덮친 격이다.


앞선 네 가지 상황을 겪으면서 내가 제일 답답한 점은 무지한 애들한테 제대로 한마디도 못했다는 것이다. "너 그거 무지함에서 나오는 혐오야. 그것도 인종차별이야."라는 말이 너무 하고 싶지만, 낯도 가리고 분위기를 망칠까 봐 두렵기도 하다. 모르는 사람이 그랬다면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게 아마 가장 안전한 방법이겠지만 또다시 교환학생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한다면 "왜 나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해? 한국 몰라?" 정도의 말은 해야겠다. 아니면 "No"라는 말과 함께 기분 나쁜 표정 정도는 지어야 겠다. 이럴 용기가 생기기 전에 이 정도의 인종차별에는 익숙해질 것 같기도 하지만.


벨기에에 오기 전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에서는 여성이라서 차별받지만, 해외 나가면 동양인 여성이라서 차별받는다." 차별을 두 배로 당한다는 뜻이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느낄 수 있었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유럽이 좋았는데, 그 여유로움과 평화는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나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잔세스칸스와 안네 프랑크의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