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 할래!!
2015년 5월
나 다시 돌아갈래!
첫째가 만으로 3살이 되고, 둘째가 만으로 1살이 되면서 나의 자존심이 또 꿈틀거렸다. 다시 빨리 뭔가를 시작하지 않으면 경력의 공백이 커질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열심히'를 모토로 달려온 내게, 수입을 창출하지 않는 육아의 세계는 보람되지만 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는데 정말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왠지 공허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 을 하고 싶었다.
또다시 나를 잃어버리까 두려웠다.
단지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한국 못지않게 비싼 집값에 매달 나가는 모기지 이자만 해도 거진 월급의 반이었고 그 외 세금 및 생활비뿐 아니라 두 아이의 부모로서 앞으로 돈 들 일이 많을 거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결국 언젠가는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니 공백이 길어질수록 재취업에 대한 불안은 높아만 갔다.
2015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있긴 있을까?
각종 취업사이트를 보며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흔한 Admin job도 Fluent in English가 기본 조건이었다. 당연한 그 조건이 나에겐 결격사유가 되었다.
다시 IT/mobile 분야로 재 취업을 해야 할까 생각도 했었다. 실제로 여기저기 이력서도 넣었고 3~4년의 공백에도 인터뷰 및 오퍼를 준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COVID19 전) engineer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두 아이를 거금의 학비를 보내며 6시까지 사립기관에 맡길 자신이 없었다. 나의 수입이 모두 학비로 쓰여야 했고, 있었다한들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거 같다.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 탓인 건지 T인 내가 출산으로 인해 선택적 F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돌아가서 다시 결정하래도 난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 같다.
재차 말하지만 나에게 육아와 일의 병행은 현실적이어야 했고 실천 가능해야 했다.
그럼에도...
일을 하고 싶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집 밖을 나가고 싶었다.
집 밖을 나가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예전에 일하며 느꼈던 그 자아도취를 느끼고 싶었다.
상황에 예전과 같지 않은 현실임을 알기에 예전 같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실현가능성이 없었으므로..
그저 그 일이 무엇이든 상관은 없었다. 일주일에 단 몇 시간이라도 '나'이고 싶었다.
Part Time Sales Advisor
신랑이 마침 직장을 옮겨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고정적이진 않았지만 재택이 가능한 날들을 잘 이용하여 내가 일을 할만한 게 있을까 알아보던 차 retail shop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파트타임이 가능했고 주당 working hour가 짧았다. '실현 가능성'의 조건에 부합했다. 애들 키울 동안만 pocket money 벌며 경력의 공백을 채우기에 괜찮았고 육아에서 벗어나 사람 좀 만나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력서를 넣었는데 그중 *Laura Ashley라는 곳에 면접 요청이 왔고 바로 취직할 수 있게 되었다.
시작은 Part time Sales Advisor였다.
아이가 어린 점을 감안하여 아이들 Nursery (어린이집) 보내는 시간대로 부탁해 볼 요량이었다. 특히 첫째는 당시 오후 3시 반까지 정부에서 학비가 지원되었기에 둘째만 감당하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하였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손님들 만나 필요한 거 없나 물어보고 계산해 달라 하면 계산해 주고, 뭐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내가 일한 로라아슐리 지점은 2층으로 매장이 큰 편에 속했고 홈 인테리어, 가구 & 패션까지 모든 품목을 판매하는 지점이었기에 그만큼 업무량이 방대하였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엔 물건들이 입고되며 오픈전 두 시간 동안 소품들 진열하고 가구 재배치하고 사다리 올라가 커튼 재고 정리를 해야 했다. 2 층에 옷창고로 양손 가득 옷들을 들고 왔다 갔다 뛰어다니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곳은 가구, 라이트, 소품의 디자인마다 개별 이름이 지정되어 있었고 심지어 월페이퍼마저도 디자인별 이름이 있어서 제품마다 이름을 다 외워야 했다.
수십 통의 문의 전화를 대응하려면 이름을 듣자마자 무엇을 찾는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꿰뚫고 있어야 했다. Customer service가 형편없었던 로라애슐리 본사의 일처리 덕에 하루에도 수 통의 컴플레인 전화에 응대해야 했다.
판매뿐 아니라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하는 맞춤 커튼, 월 페이퍼/페인트 패턴과 컬러 추천, 맞춤 블라인드 추천 및 사이즈 추천 그리고 개인 스타일러처럼 옷 코디에 대한 조언과 맞춤 액세서리까지 오퍼 하는 일까지 일의 범위가 다양했다.
세일은 왜 또 그리 자주 그리고 많이 하는지.. 원가는 비싼데 워낙 세일을 자주 하니 세일시즌마다 손님들로 바글바글하고 가구, 소파, 커튼 등 Made to measure 해야 하는 제품들은 1-2-1으로 붙어서 설명해 주고 오더를 넣기까지 ( 크레디트카드도 팔았어야 했음) 족히 30~40분이 걸리니 손님들이 줄을 서고 기다렸더랬다.
지금 생각해도 최저 임금 (당시 최저임금이 시간당 £8도 안될 때였음)에 비해 너무나 양심 없는 업무량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인 나에게 업무량 정도야 그냥 하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도 아니었다.
Shift일이다 보니 오후 3시가 넘어가는 시간대도 종종 끼어있었는데, 그것도 신랑이 커버해 주겠노라 하여 '질러보자! 하면 되지!'
별거 아닐 줄 알았다.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했어야 했던 나의 일과 육아의 Balance는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불찰로 풍랑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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