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ail의 현실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아이 핑계로 shift시간을 조절해 볼 요량이었던 나의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 아이가 있는 집이 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손주 봐주는 할머니도 계셨고, ( 영국의 리테일샵에는 브랜드 타겟층에 따라 어른들도 많이들 일하신다.) 애가 5명인 집도 있었다.
한국처럼 생각했었나 보다. 한국의 샵들은 젊은 언니들 위주였고 내가 주로 다니던 쇼핑샵들도 그러했다. 로라 아슐리의 연령층을 고려하지 못했다.
주말이나 Bank holiday (Christmas, New year, Easter 등의 공휴일) 에도 일을 해야 했고 shop closing time이 저녁 8시였기에 오후 타임에도 돌아가며 커버해야 했다.
Retail 분야 경험이 없던 나는 그쪽 생태계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부탁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가끔씩 용기를 내어 부탁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만 육아를 하는 게 아니었기에 나만 생각하며 스케줄을 짜달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주 치 단위로 스케줄이 나와서 매주 일하는 시간이 달랐고 휴가라도 낼라 하면 1년을 내다보고 빨리 선점하는 사람이 원하는 시간에 휴가를 낼 수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1~2주의 방학이 있는 영국의 공교육에서 방학마다 휴가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럴 때마다 신랑한테 부탁할라치면 '몇 푼 벌자고 이래야 하나' 싶어 자괴감이 들 때도 있고, 신랑한테 미안하고 눈치도 보여서 현타가 종종 왔었다.
시작부터 나름의 계획은 틀어졌지만, 그렇다고 호기롭게 시작한 일을 바로 깨갱하고 포기하고 싶진 않아서...
그냥 해보기로 했다.
어찌어찌할 만했고 나름 열정도 있었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기 센 그녀들.
모든 리테일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곳에서 일하셨던 기 센 언니들의 텃세가 생각보다 심했던 것이다.
업무량도 많은데 기 센 언니들은 새로 들어온 동양애가 영어까지 어설프니 그렇게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대놓고 얘기는 안 하지만 은근한 텃세가 있었고 힘들고 귀찮은 일들을 떠넘기기 일 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업무량은 방대한데 pay는 최저 시급을 받으니 손님이 없을 때 해야 하는 업무까지 열과 성을 다해 일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때 마침 들어온 동양애가 땀 뻘뻘 흘리며 일해주고 있으니 '잘됐다.' 싶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뒤로한 채 시작한 일이었기에, 나는 열심히여야 했고 빨리 그 환경에 적응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설픈 영어로 이것저것 물어보며 도움을 청하는 동양 여자애를 제법 티 나게 귀찮아했다.
영국에서 일해본 한국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일 처리의 기준이 한국과 많이 다르다. 내 눈에 그들이 하는 일은 느렸고 체계적이지 않았고 답답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일도 못하면서 텃세만 부리는 그녀들이 어이없고 짜증 났다.
여하튼 기 센 언니들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 안 죽은 척!' 연기를 하며 내가 할 일에만 집중하려 노력하였는 것뿐이었고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그 와중 몇몇 친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Full time sale leader로 진급하게 되었다. 일 시작한 지 5개월 만의 진급이었다.
Sales leader로 Promotion 되다.
Sales leader가 되면 Sales advisor보다 manager로써의 업무가 늘어난다. open/close time에 꼭 한 명 이상의 sales leader가 있어야 하고 cash관련 Audit 들에 관여해야 하며, Complaint 및 refund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채워야 하는 Sales Target양도 늘어났다.
3개월마다 New season을 위한 새 단장을 leading 해야 하고 Store Manager에게 업무 보고도 해야 했다.
나는 어느새 기 센 언니들의 상사가 되었고 상사로써 그들에게 업무를 부탁? 혹은 지시? 하는 상황들이 종종 생겨났다. 그들은 그들의 권한 안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나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난 더 센 척을 했던 것 같고, 나의 표현들은 더 직설적이고 듣기에 rude 해져만 갔다.
당시에 난 그 부분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비단 언어표현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 DNA에 숨어있던 Hirache (계급) 문화가 꿈틀 되었던 게 분명하다.
내가 그들의 보스쯤으로 착각한 착각의 늪에 빠졌던 것이었다. 팔에 완장 하나 찼다고 날 무시했던 그녀들 위에 군림하고 싶었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일하던 동료가 나의 영어 매너를 지적하며 조언을 해주었다. 지적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나에겐 금 같은 조언이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평소에 얘기를 하면서도 뭔가 답답하고 상대방이 받아들일 때 ' 일 시켜서 기분 나쁜 가?' 하며 걱정됐던 부분에 대한 뭐가 문제인지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일을 시켜서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고 나의 표현이 매너가 없었기에 기분이 나빴던 것이었다.
예를 들면 Can you do it? 하고 물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해줄래의 의미로 물었고 문법상 틀리진 않지만, 억양에 따라 rude 하게 들릴 수 있었고 please도 붙이지 않아 polite 하지 않았던 것이다.
Would you mind...?
Can/Could you please....?
should/ have to/ need to / must
문법적으로 알지만 경험하지 않으면 느끼기 힘든 상황별 사용해야 하는 표현들, 톤과 억양에서 나오는 존중감의 차이들까지 그런 미세한 차이들을 무시했던 것이다.
똑같은 표현을 쓰더라도 톤이 중요한데 영어가 미숙한 나의 톤은, 말은 영어지만 리듬감은 1도 없는 직설적인 콩글리쉬였다. 그러니 나의 의도가 어찌 됐건 그들이 듣기에 공격적이었던 것이다.
당시 기죽지 않으려 센 척할 때라 억양도 부드럽지 않았고 좀 더 꽂히는 톤이었었다.
영국에서 직급 차이의 의미가 직분 영역의 차이일 뿐이란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낮춤으로 나의 자존심을 높이려 했던 못나고 교만한 마인드가 언어로써 표현되었던 것 같다.
'나의 부족한 마인드 탓+ 부족한 영어 탓 + 학교에서 영어를 문화와 매너는 제외한 글로만 배운 탓'으로 핑계를 대보며...
그 후, 나는 나의 표현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조금 더 부드럽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하려 노력했다.'그들이 일을 열심히 하고, 안 하고에 오지랖 부리지 말고 나나 열심히 하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더니 스스로 만들었던 스트레스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그녀들과의 관계도 점차 개선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기 센 언니들은 나의 못난 자격지심이 만들어 낸 자기 방어적 이미지였었던 것 같다.
물론 정말로 대놓고 rude 한 어린 친구도 있었지만 다행히 퇴사하였고, 그 안에서 맺은 귀한 인연도 있었다.
Saskia라고 20대 중반에 너무 예쁘게 생긴 영국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나보다 한참 어렸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YES로 받았고 열심히 했고 불평이 없었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Small talk이 일상인 이 나라에서 (생각보다 남의 뒷얘기를 많이 함) 남이 하는 가십에 적당히 동조는 하되 자기 입에서 흉을 보는 법은 없었다. 그녀는 적이 없었고 두리뭉실 잘 어울렸지만 그렇다고 여느 그룹에 껴있진 않았다. 고급스킬이었다. 감사하게도 그녀와 나는 친했고 퇴사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
L Henley에서 노닥노닥. R:그녀의 약혼식 그녀를 롤모델 삼아 그렇게 나는 적당히, 가볍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게 관계를 유지하며 retail 직장 문화에 적응하고 있었다.
퇴사하던 날 farewell dinner. 일 끝나고 피곤했을, 텐데 한 명도 안 빠지고 다 나와주어서 고맙고 감동이었음.
매너 없는 손님들 컴플레인 처리를 하며 나의 어설픈 영어는 생존 영어로 바뀌었고 그 많고 어렵던 업무도 어느새 손에 익어 판매실적이 좋은 직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렇게 어디 가서 움츠러들지 않을 정도의 자신감이 생겼다.
욕심이 났다.
'이왕 시작한 거 Store Manager도 할 만하겠는데...? 이쪽으로 커리어를 쌓아보자!'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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