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타이핑, 파일정리, 출판사 교정 알바
짧은 재수기간을 끝내고 2003년 8월, 대학교 합격통지를 받았다.
H대 1학기 수시모집 합격이었다.
원했던 최고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당시 내 상황에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다.
합격통지를 받고 그 다음날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집근처에는 입시보습학원들이 많았다. 그 중에 한 곳에서 영어 문제지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뽑는다고 했다.
한글, 영문 타이핑 하는 건 자신있었다. 그곳 선생님이 손으로 쓰신 내용을 한글파일로 만들었다.
당시에는 마음도 복잡했고, 다른 생각 할것 없이 그저 하루종일 타이핑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오래 할 일은 아니었고, 그 선생님이 교재를 만드는 2주 정도만 필요한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일 외에 내가 생각해야 할 일은, 이 2주가 지나면 어떤 아르바이트를 할지 찾는 것이었다.
일하는 동안 틈틈히 다음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신기하게도 내가 입학하게 된 H대 내에서 사무실을 쓰고 있는 어떤 벤처기업에서 2달간 일할 단순알바를 뽑고 있었다.
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출근했다. 어떤 음성녹음 파일을 듣고 편집하고 분류하는 단순작업이었다.
평일에는 9시부터 6시까지 일했다. 토요일에도 원래는 9시부터 4시정도까지 일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1학기 수시모집 합격생들을 대상으로 '미리 가본 대학'이라고 해서, 토요일에 수업을 듣고 학점을 미리 따는 제도가 있었다. 나도 그 제도로 2과목을 들어야 했다. 회사에 이야기했더니 토요일에 수업이 끝나고 출근해서 추가근무를 하라고 허락받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9월에 그 수업이 개강을 했다. 재수를 해서 1년 늦기는 했지만, 곧 함께 입학하게 될 동기들을 처음 만났다. 자기소개도 하고, 친구가 되었다. 토요일은 수업을 듣는 날이기도 했지만, 수업 후에 동기들과 함께 밥도 먹고 놀게 되는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 출근을 해야 했다. 수업을 듣는 1공학관에서 다른 친구들은 아랫쪽으로 내려갔고, 나는 언덕을 넘어 벤처기업들이 모여있는 건물로 가야했다.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일하러 가는, 멀지도 않은 그 몇분간이 참 쓸쓸했다. 난 왜 입시가 끝났는데도 친구들과 놀지를 못하는지 속상했다.
그 즈음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교회에서 몇 달 후에 겨울 단기선교여행이 있는데, 참여할 사람을 모집했다. 선교에 관심은 없었지만, 그냥 이 땅을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청을 했다. 그 선교여행은 후원 또는 자비로 가는 것이어서 선교비용을 마련해야했다. 그때부터 나의 아르바이트 목표는 선교여행 자금을 만드는 것이 되었다.
그 곳에서 약속한 2달동안 열심히 일했고, 또 다시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그 다음 아르바이트는 입시교재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하게 되었다. 수능용 과학교재의 내용을 교정보는 일이었다. 갓 수험생활을 끝냈고, 이과였기 때문에 과학탐구 내용을 교정보는 일도 잘 할 수 있었다. 이 출판사는 홍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지하철로 40분정도 걸렸다. 당시 우리집은 경제적, 정서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집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씻고, 바로 집을 나왔다. 걸어가는 시간,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은 교회 제자훈련이나 선교훈련 내용을 공부했다. 알게 모르게 신앙이 깊어지는 시간들이었다.
이 회사에서는 점심시간이 되면 바로 윗층 주방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식사를 전담으로 만들어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셨고, 밥과 일반적인 한식 반찬들이었다. 나는 이 시간이 참 좋았다. 처음으로 집, 학교, 교회가 아닌 다른 사회생활을 경험하는 셈이었다. 함께 일하는 분들은 나이가 가장 어린 나를 잘 챙겨주셨다. 6시에 일이 끝나면 집이 아닌 교회로 향했다. 선교여행 준비모임이 있는 날에는 준비된 빵, 떡볶이 등의 간식으로 저녁을 때웠고, 모임이 없는 날에도 그냥 교회로 가서 기도를 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보냈다.
회사에서 먹는 점심 한끼가 나의 하루 양식인 셈이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좋았다. 무엇을 꿈꾼다는 것,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일하고 있다는 것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곳은 당시에는 신생 출판사였는데 지금 서점에 가면 그 출판사의 책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학생들에게 유명한 곳, 꼭 한번씩은 풀어야 하는 문제집을 만드는 곳이 되었다.)
그 곳에서 약속한 두 달이 되었다. 마지막 출근하는 날, 사장님께서 나를 붙잡으셨다.
"네 나이에 이 정도 큰 돈을 버는 것은 쉽지 않아. 그 동안 성실하게 일도 잘 해줘서 너무 아까운데. 그냥 여기서 계속 일하는 게 어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놀랐다. 하지만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내가 그 곳에서 일했던 이유는 단기선교여행을 가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고, 돌아오면 나는 이제 대학교 1학년이었다. 계속해서 지금처럼 출판사에서 시급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 더 크고 멋진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2주, 2달, 그리고 또 2달. 짧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경력이라고 할 수도 없고, 특별한 능력을 기른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만 버린 것일 수도 있고, 실패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내가 했던 이 사회경험들은,
어둡기만 했을 뻔 했던 나의 20살을 풍성하게 채워주었고
이후에도 가끔 꺼내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기억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