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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형준 변호사 Jun 19. 2019

사람만이 희망이다, 오늘은 다르게 (박노해)

고독한 달리기 그리고 다시

   전북대학교 도서관에서 사법시험공부를 홀로 하던 때였습니다. 아마도 사법시험 1차를 적어도 한, 두 번 정도는 떨어졌을 때이지 않나 싶습니다. 많이 지쳐있었고, 언제 그 끝이 올지 가늠이 되지 않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박노해라는 사람이 강연을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박노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 날은 유독 책에 집중이 되지 않았던 터라, 시간이라도 때울 겸 박노해라는 시인의 강연이라도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전북대학교 후생관 어디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제가 공부하던 곳 인근이어서 큰 부담도 없었습니다.    


강연장에 많은 학생들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서로 잘은 모르지만 같은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 공부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얼굴들이 있는데, 그렇게 낯익은 얼굴들도 몇 명 보였던 것 같습니다.     

  

   강연의 주 내용은 박노해 시인이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된 후 옥중에서의 공부와 사색, 깨달음 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강연이 끝난 후에는 불안하고 심란하였던 마음은 사라지고, 박노해 시인의 책을 사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용돈을 쪼개고 쪼개어 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와 “오늘은 다르게”라는 책을 사게 되었습니다. 각 책 속에는 박노해 시인이 강연에서 이야기하였던 내용들이 시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저에게 여운이 남아 계속 맴돌았던 시는 “다시”라는 시입니다.    


다시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중 p. 61)


길 찾는 사람이 새길이고, 그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시어는 불확실성에 주눅 들어 있는 저에게 제가 희망이라고 선포하는 듯하였습니다.    


photo by HAN


   박노해 시인의 강연 중에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부분은 박노해 시인의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몸이 무겁고 아플 때, 의지도 기력도 바닥났을 때, 나는 달리기를 한다. 슬플 때도 고독할 때도 나는 말없이 달리기를 한다.

한여름 불볕 아래서나 빗속에서나 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나는 달리고 또 달린다. 일단 달리기만 하면 내 몸은 저절로 운동하면서 나를 밀어가고 나를 살려낸다.

나에게 달리기는 무기 징역의 막막한 감옥살이를 이겨내는 힘이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정진하다 찬 바닥에 쓰러진 날에도, 너무 많은 활자가 소용돌이쳐 머리가 깨질 듯 아픈 날에도 아침이면 텅 빈 운동장을 달렸다. 몸이 아픈 날은 아픈 몸을 살리자고, 억압과 치용이 사무치는 날은 그 불덩어리를 승화시키고자 나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세상은 살 만한 곳으로 바꿔가는 운동은 나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에 그 운동력을 길어 올리기 위해서도 쉬지 않고 달리기를 했다. 운동장에 나갈 수 없는 날은 좁은 독방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오늘은 다르게 중 p. 239 ~ p. 240).


당시에는 공부만 하면 되는 거지라는 생각뿐이어서, 운동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를 봐주겠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지”라는 생각에 제 몸을 관리하는 것에 소홀히 하였습니다. 특히, 1년에 1번 있던 1차 시험을 치르고 나면 몇 개월 동안은 몸과 마음이 퍼져 무기력해지기도 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살기 위해 시작했다던 달리기, 점차 달리기에 익숙해지면서 호흡이 점차 깊어졌다는 이야기 등 달리기에 관한 박노해 시인의 말은 저로 하여금 달려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하였습니다.    


처음 시작은 제가 숙(宿)을 해결하던 독서실 옆에 있던 전북대학교 병원 주차장이었습니다. 저녁에 쑥스럽기는 하였지만 무작정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천천히 주차장 내를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주차장 내에서 달리기를 시작하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저처럼 달리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주차장 내에서의 달리기가 익숙해 지자, 주차장이 좁게 느껴져 좀 더 넓은 전북대학교 병원 내에 있는 공터에서 달리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더 넓은 전북대학교 대운동장에서 달리기를 시작하였고, 지루한 감이 들자, 독서실과 전북대학교 인근 동네를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지에서 천천히 달리는 것도 처음에는 호흡이 불안정했는데, 호흡이 깊어지고,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수 있게 된 후에는 인근에 있는 건지산을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건지산이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이어져 있어, 평지에서 뛰던 호흡보다 더 깊고, 가쁘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이즈음부터 건지산에서의 달리기는 사법시험 2차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매일 오후 5시에 계속되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 또는 변명으로 달리기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호흡이 깊어지도록 달려보면서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길 찾는 제가 희망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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