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2학년 즈음에 장래희망을 기재하는 란에 변호사라고 적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 그 당시에 변호사, 검사, 판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것 같고, 같은 반 친구가 판사라고 적자, 별생각 없이 그럼 나는 변호사라고 썼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혹은 학교 단체관람을 통해 영화 보기를 시작하면서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저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가서는 영화보기의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용돈을 쪼개고 아껴서 영화 관련 잡지를 사 보기 시작하였고, 매주 한 편씩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던 거 같습니다. 간혹, 야간 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와 극장으로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에 빠지게 되었고, 연극영화과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가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결국,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행정학과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저는 영화와 관련된 동아리에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영화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어서인지 동아리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군대를 다녀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 지난 일을 돌이켜 보게 되었는데, 저의 영화에 대한 열망은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영화는 삶 속에서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슬픔, 힘듦, 아픔 등 때문에 삶이 짓눌리는 것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영화에 대한 제 감정을 정확하게 알게 되면서 영화는 제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소중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게 된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라는 책에서 꿈에 관한 작가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고, 그 글은 제가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하나의 주춧돌이 되어 주었습니다. 변호사가 된 후, 감성이 무디어 갈 즈음에 그 책을 다시 읽어보고 소장하고 싶은 마음에 찾아보았으나, 이미 절판되어 있었습니다. 중고서적으로 구매한 후, 다시 읽어 본 책 속에는 몇 번이고 되 뇌이며 읽었던 때의 글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책과 책에 담긴 글의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직 ‘꿈꾸는 자’만이 그 꿈의 실재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 속에서 아무런 대가 없는 헌신과 순명의 삶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그 꿈의 가치만을 신념 하며 삶의 전부를 던져버리는 모습은 참으로 드물고, 또한 드문 만큼 그것은 고귀한 향내를 간직한다(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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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워턴(Willam Wharton)의 소설을 앨런 파커(Alan Parker) 감독이 영화로 만든 〈버디〉(Birdy)에는 〈애정〉의 절름발이 소년처럼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꿈을 꾸는 청년이 등장한다. 새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비둘기 깃털로 만든 옷을 입고 새들과 어울려 놀며, 도시 비둘기를 잡아다 집에서 같이 살면서 기르기 위해 고가도로 밑의 철골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돌아다니는 ‘새 소년’(bird boy)은 이렇게 말한다.
“비둘기는 날 수 있어.”
기가 막힌 버디의 친구 앨은 그것이 뭐가 대단하냐는 투로 묻는다.
“그래서?”
“날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그래도 모르겠냐는 듯 태연하게 말하는 버디의 대답이다.
참다운 묵종과 순명의 삶이란 바로 “날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냐?”라고 거침없이 반문하는 의식의 투명함 속에서 선연하게 확인되는 것이 아닐까. 날 수 있다는 것, 중력의 저주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신체에 밀랍의 날개를 달아 절벽을 박차고 비상의 기도를 감행해 보는 것, 땅의 탄탄한 질감을 접하는 것으로 생활의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는 많은 주위 사람들의 질시와 오해를 무릅쓰고 잡히지 않는 꿈의 역설적인 현실성을 믿고, 또 그것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해하고 느꺼워 할 수 있는 숨은 자들의 숨은 행복(p.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