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형준 변호사 Feb 08. 2019

골든아워(Golden Hour) 1, 2

그 사람을 가졌는가


11년 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를 하고 지금 아니면 언제 해외여행을 해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재정적으로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을 기대하며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국종 교수(아주대학병원 외상외과 과장,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장)의 골든아워(Golden Hour) 1, 2와 애덤 그랜트의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등 책 3권을 배낭에 넣고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세비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골든아워 1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세비야에 도착하여 세비야 대성당 인근을 돌아다니며 세비야의 건축물을 구경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국종 교수의 삶에 대한 여운이 계속 맴돌았고, “이국종 교수는 왜 그 일을 계속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외상이 몸에 가해진 물리적 충격에 의해 손상된 모든 것을 의미할 때, 중증외상은 생명이 위독할 수 있는 외상으로 반드시 수술적 치료 및 집중치료가 필요한 상태를 뜻한다.(골든아워 1 중 p 46)


숙소에 돌아와 시차와 오랜 걷기의 피곤함으로 인해 잠시 잠에 취했다가 이른 새벽에 다시 일어나 로비로 나가 외롭게 켜 있는 작은 스탠드 아래에 있는 널찍한 의자에 기대어 다시 책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2003년 말부터 시작된 끊임없는 사직 압력 속에서도 ‘잘리는 순간까지는 최고의 수술적 치료를 제공한다’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내건 직업적 원칙이었다.(골든아워 1 중 p 247)


현실의 벽과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딘지 모를 종착지를 향해 치열하게 내달리던 중 2011년 아덴만 여명 작전으로 부상당한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것으로 인해 한 때의 국민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2012년 전국 거점 지역에 권역외상센터가 설립되고, 국가가 행정적, 재정적으로 지원하도록 하는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되기도 하였지만, 이국종 교수와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는 아직도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책 속에 나타난 이국종 교수와 중증외상센터 팀원들의 치열한 삶에 울컥하는 마음이 연이어졌습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원론적으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말하고는 있으나, 사실 왜 지속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지가 오래다. 좋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이 유일한 장점이었으나, 그것을 위한 대가는 너무 컸다. 쉴 새 없이 고꾸라져 나가는 팀원들을 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골든아워 1 중 p 420)


이국종 교수는 자신의 종착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 나는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나갈 것이다. ‘정경원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이라는 생각을 나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때를 위해서 하는 데까지 해보아야 한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골든아워 2 중 p 313)


이국종 교수의 종착지에는 정경원 부교수(현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교실 부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국종 교수가 골든아워 1, 2의 서문 앞에 “정경원에게”라고 써 놓은 이유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정경원 부교수를 처음 면접하였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았으나 그런 마음은 애써 눌렀다. 좋은 사람은 더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정경원에게 그간의 내 경험과 암흑 같은 미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는 조용히 들었다. 내가 두서없는 말들을 끝냈을 때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거면 됩니다. 큰 욕심은 없습니다.
예상 밖의 말이었다. 나는 내 업을 부끄럽지 않게 하고 싶을 뿐 내가 하는 일에 ‘소명’이나 ‘사명’ 같은 단어를 대입해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게 월급을 주는 것은 신이 아니라 병원이다. 신의 존재는 나에게 멀었고 그리스도적인 삶이 외상외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경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곧은 심지(골든아워 1 중 p 142)는 충분히 느껴졌다. 그럴수록 그를 이 사지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거듭 설득했으나 그의 답은 하나였다.


-저는 외상외과 수련을 마치고 난 뒤 직장에 대한 보장이나 윤택한 삶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어디에서든 사람을 살리는 외과의사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심도 있는 수련을 받기를 바랍니다.(골든아워 1 중 p 143)


골든아워라는 책을 덮고 이 글을 쓴 후, 몇 차례 수정을 거듭 하다가 문득 함석헌 선생님의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