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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천고래 Apr 12. 2018

바가지를 들고 달려라, 후로 마라톤

Prologue_후로 마라톤 도전기

 

   여기, 이상한 마라톤이 있다. 마라톤은 마라톤인데 경로가 정해져 있지 않다. 이동 방법도 상관없다. 심지어 차를 타도 좋다. 준비물은 더 수상하다. 수건과 비누와 바가지라니, 어디 목욕 가세요? 그렇게 물어온다면 "네, 얼떨결에 맞추셨네요."라고 말할 수밖에. 정확히는 마라톤의 내용 자체가 42.195번의 목욕을 하는 거지만. 그런 마라톤에 대체 누가 참가하냐고 물으면 완주한 사람으로서 할 말이 아주 많다. 하지만 그러기엔 입이 아플 테니까, 또 글을 적기로 했다. 왜냐면 이미 이런 대화를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



"팀장님, 연차를 좀 쓰겠습니다."

"어디 좋은데라도 가려고요?" 

"후로 마라톤에 갑니다." 

"오, 마라톤도 해요?" 

"그게 아니라 목욕하러요, 42.195개의 온천에 가야 해서요." 

"......?" 

"목욕을 하는 마라톤입니다." 

"아... 그렇군. 잘 다녀와요." 



사진 속 수첩이 '후로 마라톤 전용 수첩'이다.


    연차를 사용하기 위한 목적이라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지만, 궁금해할 여러분들을 위해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후로 마라톤은 '목욕 마라톤'이다. 프로(Pro)가 아니다. '후로(風呂)'다. 후로는 일본어로 목욕탕 또는 욕조를 의미한다. 


    후로 마라톤의 핵심은 목욕하는 마라톤이라는 것이다. 미션은 단 하나, 여러 온천에서 목욕을 하며 도장을 모으는 것. 코스는 총 세 가지인데, 초(超) 풀코스는 88.195개, 풀코스는 42.195개, 그리고 하프코스는 21.195개의 온천에 가는 걸 목표로 한다. 참고로 풀코스의 목표는 마라톤 완주 거리인 42.195km에서 따왔다고 한다. 


    5일 내에 목표 개수만큼의 온천 도장을 지정된 수첩에 모으기만 하면 완주고,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등수를 매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타인을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오로지 온천과 내가 겨루는 세계관. '온천이 남느냐, 내가 남느냐'라는 치열함과 드높은 기상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렇게 빨리 또 벳부에 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지난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벳부 온천 명인 도전은 어느새 꼭 이루고 싶은 꿈이 되었다. 언제 또 갈까 궁리하던 차에 후로 마라톤은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풀코스를 완주하면 42개의 도장을 더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후로 마라톤 기간 동안 많은 온천들이 무료 개방된다고 하니, 놓칠 수 없지!  


    그런 이유로 떠나왔다. 손에는 어느새 하늘색 바가지와 수첩이 들려있었다. 참가번호는 47번. "자, 이제 출발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나는 벳부의 거리로 나섰다. 만개한 벚꽃들을 길동무 삼아, 환한 달빛을 등대 삼아 걸었다. 골목 어귀엔 희미한 습기와 비누 내음이 느껴졌고 그곳엔 어김없이 온천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도 있었다. 반가운 재회를 했고, 새로운 친구도 만났다. 온천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모두 하나가 되었다.



기어코 성공한 42개의 입욕 인증샷들.


    하루에 열 개의 온천을 다녔고,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구태여 왜 이렇게 힘든 도전을 한 거냐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지만 그건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온천에 가만히 잠기면 알게 되니까. 행복에 이유는 필요 없다는 걸 말이다. 온천에서 힘을 얻고, 온천에 힘을 쏟는 시간. 순례자의 마음으로 고통과 행복을 느끼며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온천으로 가득 채웠다. 실수가 가져다준 우연 조차도 기꺼웠다. 덕분에 잊지 못할 추억들도 한아름 얻었으니까.

  

    그렇게 5일간의 후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이 이야기의 끝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될 뿐이겠지만, 바가지를 들고 눈썹 휘날리게 벳부를 누볐던 순간들을 다 담을 수 없어 글쓰기를 또 시작하려고 한다. 축제가 막 시작된 흥겨운 시간 속으로, 다시 처음 바가지를 받았던 설레는 첫 마음으로. 


    자, 그럼 바가지를 들고 함께 달려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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