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수 onsoo Jan 13. 2020

친구라는 위로

밝은 모습이 되고 싶을 때, 떠올리는 기억

H와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다녔다. 그리고 얼마 전 그의 예쁜 아들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고등학교 동아리 방에서 H를 다시 만났을 때 반가워서 먼저 인사했다.

“야, 정말 반갑다. 나 기억해?”
“어, 어. 알 것 같아”
“내가 너 보면 쫓아다니면서 장난쳤었잖아”
“그, 그랬나? 기억날 것도 같아.”
“응, 그랬었는데. 내가 기억해.”

어린 시절 타박타박 조용히 걸어 다니던 H의 모습이 생각났다. 꼭 벽 쪽으로 붙어서 걸었다. 단짝 친구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동네에서 H를 보면 꼭 뛰어가서 놀리고 싶었다. 쿡쿡 찔러보고 말을 걸고 싶었다. 마주치면 반가워하고, 금세 잘 가, 하고 헤어지는 사이.

고등학교 동아리 방에서 만난 H는 여전히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도 잘 못 마주치고 당황하지만 싫지 않은 기색을 하는 모습이 그대로였다. 동아리가 모이는 날이면 나는 다른 친구들이랑 놀다가도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는 H에게 가서 한 번씩 말을 걸었다.

“이게 뭐야? 곰이야? 곰 안에서 사람이 나와? 좀 무서운데, 그래도 너 진짜 그림 잘 그린다.” “응, 응. 맞아. 이게 인형인데 지퍼가 열리면 사람이 나와.”

더듬더듬 말하지만 조근조근 다 설명해주는 HJ가 귀여워서 꼭 한 번씩은 꼭꼭 찔러보고 헤어졌다. 어느 날은 문득, H가 잘 웃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 눈에는 기분이 좋거나 싫거나 하는 미묘한 표정이 보였기 때문에 별로 인식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문득 그런 느낌이 든 것이다.


아마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에도 자꾸 그가 신경 쓰였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며칠을 보니 정말로 그랬다. 고개를 숙이고 살짝 웃기는 했지만 활짝 웃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던져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H의 책상에 매달려 그의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너는 왜 잘 웃지를 않아?”
“내가 그래? 난 몰랐는데.”
“응 맞아 너 잘 안 웃어. 한번 웃어봐.”
“아니 난 못해.”
“그래? 웃으면 좋겠는데.”
“그래? 내가 웃으면 좋겠어?”
“응. 웃으면 좋잖아. 어려우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안녕.”
 
그러던 날,
“하, 하, 하, 정말 웃기다.”

H의 자리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가 웃었다. 하,하,하 라고 정확하게 말하며. 내가 보았던 H의 입 중에 가장 크게 벌어진 입을 보았다.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은 모두 놀라 조용해졌다.

“H가 정말 웃은 거야?”
“맞아. 쟤 지금 하하하 하고 웃었어.”

H는 “응.”이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하, 하, 하 하고 웃었다.

“네가 웃으니까 무서워.”라고 누군가 눈치도 없이 말했다.
나는 H가 당황할까 재빨리 기쁜 말투로 말했다.
“왜 좋잖아. 진짜 좋은데! 근데 네가 진짜로 웃을지는 몰랐어.”
“그래?” 하고 H가 짧게 대답했다.

그 뒤로도 H는 계속 웃었다. 처음에는 어색했고 웃을 때마다 친구들이 흠칫 놀랐지만, 개의치 않고 웃기로 결심한 듯 웃었다. 나는 그게 매번 괜히 마음이 짜르르했다.

H랑은 둘이 같이 동아리 총무가 되었다. 내성적이지만 열성이 있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맞아서, 같이 여러 가지 일을 도모했다. 동아리 사상 첫 계곡 MT, 사람이 말이 되어 움직이는 거대 부루마블, 획기적인 축제 홍보물 제작. H랑 재미있는 추억이 정말 많다. 핑크를 좋아하고 오토바이를 좋아하고, 다리를 걸면 픽 쓰러지는 이상하고 재밌고 세상 순진한 내 친구.

얼마 전 짐을 정리하며 발견한 롤링 페이퍼에서 HJ의 메모를 보았다. 항상 보던 그의 글씨체로 ‘네 슬픔을 알고 싶고, 힘이 되어 주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 가만히 앉아 그 글을 들여다봤다. 그때엔 그 글을 보고도 모른 척했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집에서 나와 고시원에 살고 있었던 나의 다른 면을 친구들이 알면 분명 나를 어색해하고 멀어질 거라 생각했었다. 끝내 이야기하지는 못했어도 그 시절 내 속마음을 궁금해해 주었던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 큰 위로였다.

H에겐 늘 고맙다. 지금도 처음 가는 곳에서 친구들이 모이면 길을 잘 못 찾는 내가 헤맬까 지도를 보내준다. 모임 속에서 H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좋고 힘이 난다. 밝은 모습이 될 용기를 내야 할 때면 H가 처음 크게 웃던 날을 생각한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이미지이다.

어린 시절, 빨간 벽돌담에 붙어 서서 ‘어, 어 안녕!’ 하고 주뼛거리며 인사하던 그 아이가 이렇게 오랜 시간 나의 삶 안에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소식을 나누고 마음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항상 고맙고, 당연하지 않게 소중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지막 가시를 뽑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