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 보너스. 월급. 나 잠시 부자.
며칠 전에 신랑이 승진을 했다고 했다.
아. 승진이라는 게 있었지.. 어. 축하해. 축하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시크(라는 단어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지만)하게 얘기했지만 내심 신랑은 기뻤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갑자기 들어온 보너스가 있었는지 뜬금없이 돈을 입금해주고는 신랑이 모른 척을 했다.
나는 오전에 밥을 챙겨 먹고 집을 대충 치운 상태로 TV를 보며 뒹굴거리던 중이었다.
습관적으로 쳐다보는 핸드폰에 문자가 와 있었고 그게 그 돈이었다.
음. 뭐지. 뭔가.
"뭐야?"
아차차.. 이거 안된다.
방금까지 더운 날씨에 숨을 헉헉거리며 집을 치우고 있었지만 한껏 기운을 올리고 다시 보낸다.
날 닮은 이모티콘을 사뒀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씐나는 얼굴로 방실거리는 놈으로다가 딱. 찍어주고.
이거는 도대체 무슨 돈이냐며 매우 기쁜 얼굴로(이모티콘) 아양을 떨면서.
잊지 않고 말해둔다. 아 승진하면 다달이 이리 보너스가 나오는 것이냐며.(그럴 리가)
나는 그렇다면 기술을 안 배우고 평생 살아도 되는 거냐고도.(내가 바로 전날.. 기술자가 되고 싶다고 했었었다.. 뭔가 손으로 하는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역시 신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날 모르네.. 나 진짜 한다고 이 사람아..)
이 사람 또 시크(안 어울린다니까)하게 말한다.
"돈."
아. 그래... 고맙다.
나 또 까르르 까르르 궁뎅이를 흔들어준다.
우리 신랑만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사람은 이런 걸 좀 바라고 즐기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돈 많이 벌어다주고 명품 가방 사주는 남자들에게 궁뎅이를 흔들어대는 여자는 아니다.
물론 돈을 싫어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실은 매우 좋아하죠- 그 조건만으로 남자를 고르려고 했으면 지금의 신랑과 절대 결혼해서는 안됐었을 정도로 결혼 당시 신랑의 조건은 경제적으로 최악이었다.
그 데이트를 하던 시절에 이 사람이 나를 좀 적극적으로 꼬시고 싶었는지 명품가방을 선물했던 적도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나는 그런 류의 물건에 크게 감동하는 여자가 아니어서 그 효과를 별로 보지는 못했고. 대신 우리 엄마가 쓸데없이 깊이 감동하셨던 기억이 난다.
결혼하고 2-3년을 신랑 빚을 갚으며 살았고. 그로부터 6년 정도를 더 빚을 갚고 살며 저금 같은 거는 못해보고 살았었다.
그 6년의 빚은 우리 빚이었다(전세자금). 결혼 전에 빚만 갖고 있던 사람이니 전셋값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다.
그러니까 거진 8년을 빚만 갚다가 딱 플러스 마이너스 0원이 되었을 때.
우리는 빚 없이 전세를 살고 있었고.
아이도 하나 있었고.
부지런히 그로부터 저금을 할 수 있었다.
신랑도 그때를 회상하면 미안해하긴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돈이란 돈은 생기는 대로 다 나한테 송금해줬고 내가 돈을 관리하는 거에 대해 일체의 간섭은 없었다.
시댁에도 어마어마한 돈이 흘러갔고 또 지금도 흘러가고 있지만.
이 사람은 꿋꿋이 자기계발을 하며 직장 내에서 승진도 여러 번 했고 우리가 갚은 돈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내게 갖다 주었다.
내가 굳이 "그래.. 이 사람은 장래가 있어! 믿을만한 사람이야! "라는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다행히도 애초에 갖고 있던 빚보다는 몇 배의 이윤(?)을 안겨준 터라 그럭저럭 화를 조절하며 데리고 살고 있다.
근데 저런 거.
돈 받고 막 좋아하고 가방 받고 막 팔딱거리고 이러면 이 사람 한편 되게 뿌듯해할지도 몰라..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속물인가..
그렇다면 확실하게 되게 많이 벌어오든가.
나 이런 푼돈에 팔딱거리는 여자 아니라고.
그래도 또 분위기 한번 맞춰줘야지 싶어.
보너스에 승진에 월급까지 들어온 마당에 우리 오늘 어디 가서 맛있는 거 먹자. 며 주말 끝자락에 내가 외쳤다.
요즘 내가 '냉장고 파먹기'를 한다며 알뜰살뜰 산다는 척을 열심히 하기도 했고.
너무 수고한 '당신'을 위해 우리 즐겁게 파티를 해요~하는 기분으로 딸내미를 꼬드겨 '고기'를 먹으러 가자 분위기를 잡았다.
고기에 약하고 물질에 약한 딸내미는 삼겹살을 먹고 쇼핑을 가자며 팔딱거렸다.
우리는 그 유명하다는 돈 00 어쩌고 식당에 가서 1인분에 18000원짜리 삼겹살을 시켰고 식사까지 각각 시켜 야무지게 먹고 나왔다.
그 곁에 있던 교보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쭉 빨며 책을 장바구니에 턱턱 담아 신랑에게 내밀었다.
"어이~ 이거 승진 기념으로 나 사줘.."
옆에서 보고 있던 딸이 눈을 번뜩이더니 이내 아빠를 끌고 사라졌다.
보드게임에 책에 방에 놓을 시계까지.
야무진 년.
"아빠~ 이거 승진 기념으로 나도 사줘~~"
내가 커피를 무려 한잔 더 사와 빨고 나타나자
"커피를 또 샀나. 니 돈 많나?" 하길래
슬쩍 입출금 잔고를 탁 찍어 보여줬다.
"나 돈 많지~ 신랑이 줬어. 이거 나 다 쓸려고 " (입출금에 들어온 채로 갖고 있었다)
신랑은 뭐 입을 쑥 내밀며 두 여자 때문에 자기는 3000원짜리 볼펜심 하나 샀다고 툴툴거리듯 말했지만 씩 웃으며 기분이 좋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을 좋아한다.
두 여자가 "아우~ 돈이 좋아~ 사줘서 고마워~" 하며 좀 속물같이 키득거리며 아양 떠는 상황 같은 거.
그렇다면 애초에.
명품가방에 뻑가는 여자를 만났더라면 더없이 행복했을까.. 는 불가능.
명품가방 사줄 능력까지는 안되고.
혹시 명품가방을 턱턱 사줄 능력이 됐더라도 자기 마누라가 명품 사달라고 애교를 부렸으면 이 남자는 발로 뻥 찼을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이건 우리 가족끼리 통하는 우리끼리의 한도 안에서의 사치다.
근데 이 사치라는 게 사람마다 달라서.
나는 딱 저 정도면 꽤 만족스럽게 파티를 종료시킨다.
며칠 동안 입출금에 목돈을 넣어 놓고 체크카드로 쓸 때마다 울리는 문자를 보며 잔고에 좀 흐뭇해하기도 하다가.
다시 오늘.
여기저기 세금 내고 학원비 내고 자동이체 나갈 만큼만 남겨 두고는 '돈 모아두는 통장'으로 이체시켜 정리를 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 딱 한 달치의 여유자금이 남고 나는 다시 나름 검소한 삶으로 돌아온다.
잔고가 사라지면 흥청망청 파티도 사라진다.
나는 40대이고 신랑은 40 후반으로 달려가는 나이이니 우리가 하는 사치의 종류와 사고방식들이 모든 이들의 기준과 맞아떨어질 리가 없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제각각 나름의 기준안에서 즐겁게 소비를 하며 지내고 있겠지.,,
누군가는 해마다 보너스를 가지고 해외여행을 계획하기도 하던데.
젊은 세대일수록 여행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우선순위를 두는 걸 많이 본다.
내 또래가 어렸을 때는 지금의 젊은 세대처럼 해마다 몇 번씩이라도 해외에 나가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
비용 이상으로 얻어지는 무언가가 있겠지만 당장 통장에 잔고가 쌓이는 게 좀 더 안심이 되기도 했다.(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통장에 잔고 쌓이는 걸 좋아했던 스타일이다)
젊은 엄마들은-동네 카페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다 보면- 갓난쟁이 아이를 키우며 너무 힘들어 일주일에 두 번 아이 시터를 부르고 한 번은 살림을 도와주는 도우미 아줌마를 부르기도 한다.
처음엔 솔직히 집에서 아이만 키우는 젊은 엄마가 사람을 두 명이나 쓰고 지낸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었지만.
뒤돌아 보니 갓난아이를 키우던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너무 힘들어 우울증이 올뻔했었지.. 하는 생각이 들자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방법이구나 인정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게 현명할 수 있다.
아이를 한 명, 두 명, 세명.. 낳아 계속 키우자면 나도 쉬고 맘을 추스를 수 있을 시간이 꼭 필요한 테니 말이다.
그릇을 좋아해서 애지중지 원하는 브랜드의 것들을 사모으며 행복을 느끼는 여자들도 있고.
자기관리를 위해 피부과에 가서 주기적으로 관리를 받거나 본격적인 트레이닝을 통해 잔근육을 키우는 멋쟁이 여자도 있다.
근데 솔직히 나는
그릇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은 있다!- 피부과도 무섭다.(피부과보다 니 얼굴이 더 무서워.. 라며 누군가 충고를 해준다면 그때는 가봐야 될지도)
도우미분이 오셔서 청소를 해주시면야 참 편하겠지만 사람 들여서 신경 쓰는 게 더 귀찮아 그것도 좀 그렇고.
나는 통장에 잔고 쌓이는 거 보며 안정감을 느끼는 쪽이라.
쌓이는 물건 보며 기뻐하는 일은 잘 없다. 오히려 주기적으로 자꾸 버린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초절약 상태로 알뜰살뜰 산다는 건 아니다.
가계부를 쓰고는 있지만. 그건 그냥 쓰고 있는 거고.
언제부턴가는 내키는 대로 쓰고 있다. 가계부를 써봤자 쓸 때는 써야 하고 뭐 막 줄여지지도 않더라..
혼자 돌아다니다 배가 고프면 혼자서라도 맛있는 곳에 가서 식사를 하고.
커피도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기분 좋게 마시고.
작년에 주구장창 입고 다니던 티가 올해는 또 왜 갑자기 추리한가 싶으면 나가서 후닥닥 몇 벌의 옷을 사 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뭐 비싼 거에는 크게 동요되지 않는데 여기저기 푼돈은 부지런히 쓰고 다니는 스타일이다.
우리 가정 통장의 잔고가 플러스 마이너스 상태를 오고 가긴 하지만.
그래도 몇 달에 한 번은 확실하게 플러스 상태일 때가 있고.
그 돈을 좀 비축해두고 나면 당분간은 맘이 편하고 안심이 된다.
또 언젠가 신랑이 돈을 몰래 꼬불치다 들킬 수도 있고.(제발 들키지 마라..)
내가 모르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지출의 순간들이 생기겠지만.
당장 오늘 나는 그럭저럭 사치도 했고
얼마간의 돈을 저금해두니 맘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