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쟈민..으로 제목을 지어야 할까요..
지난 주말 낮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열어놓은 창밖에서 "벤쟈민.. 벤쟈민." 하고 불러대는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은 저층이라 가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얘기 소리가 들리곤 했지만.
이 남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멋지고 또 간절한지 나는 그만 꼬리를 흔들며 뛰쳐나가고 싶어 졌다.
내가 순간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흔드는 시늉을 하자 옆에서 케이크를 먹던 딸아이가
"엄마 뭐해?"
"엄만 벤쟈민이야. 주인한테 달려가고 있어.."
킥킥 웃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럼 나는?"
넌 내 새끼니까 주인님이 같이 받아주시지 않을까..
그럼 아빠는?
아빠는.. 버리고 가야지.. 정 걱정이 된다면 네가 남아서 아빠를 챙겨주던지.
옆에서 듣던 신랑은 어이가 없다며 고개를 흔들더니 내가 계속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대자 현관문을 열어주겠다며 일어섰다.
"근데 엄마.. 막상 달려 나갔는데 저 아저씨가 목소리만 멋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역시 내 딸.
"아.. 저는 벤쟈문이에요.. 죄송합니다. 잘못 들었네요." 해야지 별수 있나.
중저음의 저 멋진 목소리의 남자가 내 이름을 저렇게 애절하게 불러댄다면 나는 어디까지 버리고 이 집을 뛰쳐나갈 수 있을까.
뭘 버릴 것도 별로 없이 가진 것도 별로 없지만. 또다시 누군가를 또 알아가고 맞춰가며 숨기던 모습들을 들키고 서로 실망하고 익숙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게 생각만 해도 헉 소리 나게 진이 빠진다.
어찌 됐든 지금 옆에 있는 저 배우자와 계속 사는 게 여러모로 편안하겠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나는 요즘 생기를 잃었다. 뭐 꼭 배우자 탓만은 아니다.
답답한 마음에 아무 버스나 타고 동네를 벗어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 생기 없이 말라비틀어져 있다...
무엇도 먹고 싶지 않고, 무엇도 하고 싶지 않으며 누군가와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러한데 나는. 허지기고. 심심하고. 외롭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성질을. 진작에 내 배우자는 딱 잘라 정의 내려 인지하고 있다.
지랄 맞은 성질.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지랄이고 배부르면 배부르다고 지랄이라는.
나는 지난번 내쫓기듯이 일을 관두고 차라리 잘 됐다며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근데 단 며칠 만에 나는 또 답답하다.
어차피 딸아이 때문에 종일 일을 하는 게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또 뭔지도 모를 일거리, 혹은 재미거리, 즐길 거리가 없어진 게 불안하고 서운했다.
화장끼 없는 얼굴에 느슨한 속옷을 입고 아무렇게나 티셔츠를 걸치고 이 번화한 건물 속 카페에 앉아있자니 왁자지껄한 말끔한 사람들 속에 내가 한없이 초라하다.
생기 없이 말라있는 이 모습으로 누군가 아는 이를 우연히 마주치는 것조차 두렵게 느껴진다.
내 속마음 다 까발리는 글을 이렇게 써대는 것도 어느 순간엔 무섭게 느껴진다.
이 지랄 맞은 성질을. 이 감정의 널뛰기를 모두 이해할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하는 생각에 미치면 도저히 자신이 없어진다.
얼굴도 화끈거린다.
내 배우자조차도 내 성질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아니 어쩌면 저이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만났다.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와야 했다.
어찌 됐건 밖으로 뛰쳐나와 후회된 적은 없었다.
답답할 때 버스를 타고 아무 곳이나 뱅뱅 돌아다니는 건 내 어릴 적부터 습관이다.
생기를 찾는 방법이야 어찌 됐든 사랑이 최고인데.
실망하고 실망해서 더 이상은 없겠지 하는 순간에도 새로운 실망 거리를 안고 돌아오시는 저 익숙한 배우자님은 요 며칠 전부터 내게 삐치셔서.
나 삐져있다..라는 아우라를 마구 내뿜고 있다.
그건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이었는데. 신랑은 그게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출근길에 내게 증권계좌를 하나 터서 달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싫다고 했다.
며칠 뒤 또 얘기해서. 나는 또 싫다고 했다. 싱글싱글 웃으며. 진심으로.
나 몰래 돈 사고(주로 시댁으로 흘러갔다)를 여러 번 쳐서 여러 번 들킨 신랑에게 어떤 식으로든 돈 관련 계좌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증권계좌가 왜 필요하냐는 물음에도 그냥 그런 게 있단다.
그래. 뭐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만들지 않을 테니.
근데 그 또 며칠 뒤. 술을 드신 배우자분께서 마구마구 섭섭하다며 자기가 그렇게 미덥지 못하다며 눈을 흘기며 술냄새를 뿜어댔다.
허.
이쯤 되면 또 대가리를 한번 굴리며 가동을 시켜줘야 한다.
뭔가 있다. 뭔가 있어..
이 사람에겐 이미 자신의 증권계좌에 얼마간의 돈이 있다. 물론 주식을 하고 있겠지. 그 돈은 마누라가 모르는 돈이다.
몇 년 전 마누라 몰래 돈을 몇천이나 숨기고 있다가 들켜서 우리 부부생활 최악의 싸움이 있었고. 나는 정말 그 충격으로 신랑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잃었다.
부부 사이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뼈저리게 느꼈었고 또 상처받았었다.
나는 한 달 이상 신랑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암튼. 이번에도 또 돈을 꼬불치다 들키면 지랄 맞은 마누라의 핏대 오른 막말을 들어야 할 테니 심히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삼 왜 내 증권계좌를...?
지난번 승진하면서 뭔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투자 관련자로 등록을 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주식투자를 할 수 없다. 뭔가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본인의 계좌를 회사에 오픈해야 한다. 서약서와 싸인 없이 몰래 주식거래를 하다 들키면 심각한 컴플라이언스 위반이다.
그러니까 아예 마누라 명의로 주식투자를 하는 게 속편하다.
아마 서약서에는 개인적인 주식거래는 없다고 사인했을 것이다.
아.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근데 술술 시나리오가 저절로 떠오르고 말았다.
나는 타고난 작가인가. 꼭 알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가 스스로 대굴대굴 굴러들어 온다.
실제로 드라마 몇 편 보면 앞뒤 스토리가 딱 눈앞에 펼쳐진다.
어. 저 할아버지 불안한데... 하면 거짓말처럼 탁 쓰러져 돌아가시더라.. (며칠 전 드라마도 그랬다.)
어찌 됐든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거야 나와 별 상관이 없지만.
내 배우자가 자꾸 거짓말을 하며. 거짓말을 숨기려다 말고 내게 서운하네 어쩌네 하면서 삐지는 건 무척 피곤하다.
나는 알고 싶지 않다고. 당신이 얼마가 있든. 얼마를 숨기는지. 이젠 있어도 빼앗아 오기도 귀찮고. 그냥 니가 관리해라.. 하는 심정이다. 진심으로.
회사에서 민망한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으려면 내게 순순히 고백을 하고 계좌를 받아가야 할 텐데.
그저 삐진 채로 날 째려보고 계시다.
돈의 출처나 존재 자체를 숨기시려고.
그저 "내가 그렇게 못 믿을 놈이더냐.." 하며 성질을 내시는데.
이제 알았냐. 너는 그렇게 못 믿을 놈이더라.
나는 진작에 너를 '못 믿을 놈'으로 규정지었었다.
내가 그렇게 '신뢰를 저버리다니.. ' 하며 슬퍼하고 있었을 때. 그 신뢰를 잃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몇 년만에 새삼 확인을 하며 스스로 분개하며 따지려 드는데... 늦었다고. 이미. 너는.
딸아이와 저녁마실을 나가려는데.
저녁 산책 중에 어디선가 "벤쟈민"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훅 따라갈지도 모르겠다.
딸아이와 내 전재산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