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연속
다음 주부터 다시 일을 나간다.
그 시크부장님이 두 번째 전화를 주셨을 때는 꽤 친절하셔서 아마도 첫날엔 좀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셨나 보다 하고 넘겼다.
나도 매우 공손하게 회사 근처에 이미 가보았다는 말까지 하며 멀지 않다고 강조를 했다.
퇴근시간도 6시로 맞춰주신다고 하고. 그 대신 다른 이들과 형평성의 문제로 월급을 조금 깎겠다고 하셨으나 나는 기꺼이 그러시라며 퇴근시간을 배려해주시는 거에 대한 감사함을 표시했다.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씩씩하게 인사까지. 깔끔하게 일 잘하는 직원이 될꺼마냥.
어쨌거나.
시크부장님 연락 주셔서 감사해요. 말 잘 듣고 걱실걱실히 일 열심히 하겠습니다.. 는 맘속으로만.
그러니까 말하자면. 일하기 전 일주일은 아주 알차게 놀아야 한다는 거다.
알바니까 보통 휴가 같은 거는 없고. 이게 일 나가는 기쁨도 잠시. 막상 사람이란 게 참 (나만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금방 또 평일날 날씨라도 좋으면 이거..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막 돌아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백수로의 전환에 대한 간절함이 또 생기고 만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일하면 놀고 싶고. 놀면 일하고 싶고.
대부분이 그렇죠..라고 하겠지만. 이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게 좀.
출근을 앞두고 평소 가고 싶었던 장소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언니와 함께.
언니가 작업하는 날엔 나는 집에서 놀고.
언니의 작업이 끝나 노는 날엔 둘이 가방을 둘러매고 경복궁역에 내려 그 근처 동네를 하루씩 돌아다녔다.
오전 10시 11시쯤 만나 오후 5시 정도까지 줄기차게 걸어 다녔다. 북촌, 서촌, 삼청동, 부암, 계동... 등등 그 일대를 골목마다 누비고 돌아다니며 옛집을 구경하고 옛골목을 헤매고 돌아다니다 우연히 아주 옛날에 갔던 장소와 마주치기도 했다.
서촌을 돌아다니다 어느 가게를 지나는데. 언니가 이 곳이 유명한 곳 이래.. 근데 남동생과 잘 아는 지인이 하는 곳이라고 했다.
우연수집. 이라는 숖이였는데 이것저것 흥미로운 물건을 팔고 있었다.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다 관두고 나와 여러 작가들과 함께 작품을 모아 그 가게에서 팔고 있다고 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와 며칠 전 사두었던 책 중에 한 권을 골라 '오늘은 이 책을 읽어볼까.' 했던 책의 작가가 '우연수집가'.
그러니까 바로 그 가게의 사장님이 쓴 책.
아니 이런 우연이 있나.
그 작가님의 책 <도시골사람>을 다 읽고 잠이 안와 TV를 켰을 때 '권나무'라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 저 가수는.
방금 책 속에서 만난 사람. 저 가수를 초대해 작가님의 전시공간 한쪽에서 작은 공연을 했었다고 했다. 저 가수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직원에게 얘기를 듣고 진행했다던 콘서트..
그러니까 우연히 간 가게였는데. 그 가게를 다녀온 저녁에 그 작가의 책을 읽었고. 그 책 속에서 만난 가수가 다시 TV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내가 요 며칠 <왓칭>1,2를 읽으며 매우 흥미로워하고 있었는데. 이게 뭔가 내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즐거운 생각을 잠시. 오. 영적인 마음의 눈이 뭔가 활짝 열리려나.
(이 책을 읽고 양자물리학이라는 분야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아인슈타인 아저씨가 했다던 말들도 흥미롭고.
제 고등학교 때 물리선생님이 '제물포'셨었는데-제땜에 물리 포기했어- 물리학이 이리도 흥미로운 거였다니!!.. 는 아직 깊이 있는 단계까지 들어가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겠지만)
부암동을 갔을 때. 언니와 난 20년 전 우리가 함께 했던 아르바이트 회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학 2학년 때쯤 학교 선배가 다니시던 회사에 같은 과 사람들이 우르르 가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 회사가 문화재를 복원 복제하는 회사라 날 좋은 날 느긋하게 앉아 이것저것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만드는 일이 무척 재미가 있었다.
조그마한 초가집모형이라든가. 그 모형 초가집에 들어가는 작은 문짝들.. 모형 나무 등을 만드는 일이었다. 새끼를 꼬아 초가지붕을 만들기도 했는데 커다란 모형을 만드는 조소 작업은 담당하시는 전문가가 따로 있었다.
방학이라 언니도 같이 불러 하게 되었는데.
꽤 넓은 마당이 있는 1층짜리 건물에 직원 3-4명은 모두 선배님들이라 우린 그분들이 마냥 편했었고. 한참 나이가 어린 후배들이라 우린 그분들의 이쁨을 받으며 점심마다 맛난 것을 얻어먹었다.
전철에서 내려 조그마한 마을버스를 타고 옹기종기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좁은 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면 보이는 작은 회사였지만. 동네의 풍경이 아기자기 평화로워 지금도 그곳을 생각하면.. 마치 현실이 아니었던 거 마냥 한없이 좋은 날의 한쪽으로 남아있었다.
그 동네가 어디였더라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언니는 그곳이 부암동 근처였던 거 같다고.. 밥을 먹고 나면 가끔 선배님이 근처에 있는 환기미술관에 가자고 했었다는 말을 기억해냈고.
그 회사 뒤에 조그마한 터널 같은 굴이 있고 그 뒤에 문화재 같은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이 닫혀 있었더라.. 는 기억은 내가 해냈다.
하지만. 20년 전의 그 장소는 그저 자매의 기억 속에 아득한 시간 너머 미지의 곳으로만 가끔 회상되던 곳이었다.
언니와 부암동을 걸어 다니다 유명하다는 만두집에서 밥을 먹고 막 나오는데 햇살이 너무 좋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쨍해서 온 몸 가득 햇살을 만끽했는데. 아. 내가 화장을 안 하고 나온 게 잠시 후회됐다.
기어코 언니가 모자라도 쓰라며 가지고 온 모자를 내밀었지만.
나는 이미 틀렸어.. 하며 꿋꿋이 햇볕에 머리를 빳빳이 들고 돌아다녔다.
배를 튕기며 막 만두집을 기분 좋게 나와 왼쪽으로 꺾어지는 순간..
어? 이런 곳에 터널이..?
아. 터널 옆 기와집. 터널.. 그 터널 뒤 문화재 건물..
아 그렇다면 이 오른쪽 건물이 그때 그 회사 자리구나.. 하며 언니와 난 보물이라도 찾은 거처럼 흥분했다.
그 건물은 아마도 증축되고 변형되어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지만. 넓었던 마당은 주차장이 되어 있었고. 들어가 보니 외부와 다르게 내부는 멋들어진 카페가 되어 있었다. 1-2층 모두 투박한 목수가 직접 짜 넣은 것 같은 나무 바닥과 나무 장식이 되어 있었고. 그 예전의 건물 내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큼직한 커피 기계들이 가게 여기저기를 차지하고 있었고 향긋한 커피내음만으로도 이 가게의 커피 내공이 충분히 느껴지는. 그런 곳.
(아참. 심지어 그 환기미술관도 우연히 찾아내 들어가 그림을 보고 나왔다. 얼마 전엔 김환기 작가에 대한 책을 읽은 적도 있었고... 그 전시관 3층에 있는 그림들은 정말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그 작가보다도 그의 부인 김향안 여사님께 깊은 감동을 받았었다. 대단한 여자다.)
우린 나란히 커피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가 찾아낸 보물을 둘러보며 행복해했다.
주차장에 내려가 예전 그 넓었던 마당의 테두리 자리를 가늠해보았고.
그제야 그 건물 앞에 있었던 커다란 다리의 밑동이 보였고.
그때와 달리 활짝 열린 그 문화재(문이 일반인에게 열린 건 불과 8년 전의 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알바를 하던 20년 전에는 그 문이 닫혀 있었다.) 안으로도 들어가 볼 수 있었고.
그때 우리는 참 아기자기 행복한 곳에서 일을 했었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번에도 한번. 팔각정을 가는 길에 이 카페를 지나며 봤었었는데. 그때는 전혀 이 장소가 그때 내가 일하던 곳이었다는 걸 연결하질 못했었다. 건물 뒤쪽에 커다란 다리 기둥도 보았었는데. 왜 그때는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었던 건지..
토요일엔 만다라 in마인드라는 곳을 오픈하는 동기 언니의 초청을 받았다.
며칠 전 우연히 그 언니가 생각났었고.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마지막 초청에 내가 응하지 않았던 걸 영 마음에 걸려하고 있었는데. 바로 어제 카톡이 온 것이다.
오픈을 하니 초청한다고.
이 언니는 학교 선생님인데 아들이 8살 때 인도에 건너가 1년 동안 생활을 하며 맘을 다스리고 돌아와 전혀 새로운 분야에 뜻을 갖고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다.
뭔가 또 어떤 이끌림으로 나는 기꺼이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몇 년 만에 보는 건지도 잘 모르겠는 만큼 오랜만의 만남이 될 것이다.
이제 주말이 지나면 다시 출근이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 한편 걱정도 되지만.
모든 일은 다 잘 풀릴 것이다.
내가 항상 알바를 하면서도. 최소 '얼마' 이상 주는 알바가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했었는데. 이번 알바가 딱 그 금액을 넘어섰다!
게다가. 나는 6시 칼퇴근하는 곳에서 한두 달씩만 일할 거야.. 했는데. 그것도 딱.
이거 뭔가 생각하고 바라는대로 된다는 생각이 드니.
흐흠.. 금액을 조금 높여볼까 생각이 들어.
에헴.. 저기 좀 욕심인 건 아는데... 내가 예전 받았던 연봉만큼 받는 알바일이 굴러들어오길 ... 하고 조용히 빌고 있다.
덧붙이자면.. 그 일은 어떤 일일 수도 있고.. 행운일 수도 있으며. 일일 경우에는 어쨌거나 애 방학기간엔 일을 못합니다. 쏘리. 하며 구체적으로 소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