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바라는 게 안타깝네요.
일을 하고 있다.
일이라기보다는 '알바'이지만.
내가 알바알바 했더니.
딸아이가 다니는 수학학원 선생님께 "울 엄마 요즘 알바 다녀요~"라고 말하는 통에
"저기 어머님.. 요즘 알바하시느라 바쁘시겠지만.. 학원에 세미나가 있는데 오실 수 있으신지.."하고 조심스럽게 전화가 오셨었다.
딸아이를 붙들고 다시 말하길.
엄마는 일을 하고 있다. 일을 다닌다고 해라..라고 타일러두었었다.
암튼. 일을 했던 중에 가장 환경이 좋은 회사다.
사는 집에서 두 정거장만 나가면 회사 바로 근처까지 가는 좌석버스가 있고 심지어 앉아서 간다.
도착하면 신도시라 엄청 깨끗하고. 큰 건물들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바글바글 버스에서 같이 내린다.
흠흠. 이거 나도 같이 걸어가도 괜찮겠어.. 하는 생각이 잠시.
뭐 어쨌거나 기분 좋은 출근길이다.
일하는 회사 일층에는 스타벅스(이용은 안 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맥도널드가 들어와 있어.
둘째 날부턴가 호기심에 맥모닝을 시켜 먹었다가 그대로 쭉 이 주째 먹고 있다.
몇 년 전에 맥모닝이 처음 나왔을 때 먹었던 기억은. 짜고. 짜도 너무 짜서. 이걸 아침으로 먹으라고?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간 짜다는 민원이 많이 들어간 건지 간이 안 짜고 맛있어졌다.
아님 그 점포에 일하시는 분들이(적어도 그 아침시간에는) 나이가 좀 있으시나 매우 스피디하신 중년의 여성들이시라 솜씨 좋게 따끈하고 맛나게 만들어주고 계신 건지도 모르겠다.
암튼. 나는 맥모닝을 세트로 시켜 야무지게 먹으며 창밖을 바라다본다.
창문 밖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쳐다보자면.
멀쩡하게 생긴 젊은 남자들이 주로 많이 지나다니는데.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거의 없고. 세련된 캐주얼 차림이 대부분이라 보는 것만으로 산뜻하다.
지난번 내가 알바를 했던 곳은 광화문쪽이어서 온통 짙은 남색의 양복들을 입고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움직이는 무리들로밖에는 보이질 않았는데(이제껏 보아온 직장인들은 대부분 그런 모습이었었다) 여기는 한 명 한 명 옷차림이 다르고. 그중 적지 않은 이들이 쎄.련.된 캐주얼 차림이라 오호~ 하며 눈호강을 하고 있다.
나는 진실로 궁금했었다.
저렇게 캐주얼을 입고 출근해도 되는 회사는 도대체 어디일까..
근데 이렇게 캐주얼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출근해도 되는 회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오니. 이게 2주나 됐는데도 꽤 신선하다.
심지어. 이 멋진 남자들은 친절하기까지 했다.
맥모닝을 함 먹어볼까나 하고 출근 이틀째에 들린 그 점포에서.
나는 참 당황스러운 기계 앞에서 주문을 하고 있었다.
물론 주문을 받으시는 직원분이 계셨으나 그분은 동시에 음식을 만들며 내놓고 있어서 주문은 당연히 기계로 하셔야죠 하는 분위기인지라. 뭐 주문쯤이야 하고 기계 앞에 다가섰다.
하지만 기계가 마침 좀 느리기도 했고. 카드를 꽂으라는데. 이게 영 읽지를 못하는지 웽웽 돌기만 해서 뒤에 계신 분께 이걸 어떻게 하는 건지..? 하며 돌아서는 순간.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30대 남자가.
아. 기계가 좀 복잡하죠. 예예. 카드를 거꾸로요. 네네. 기다리세요.. 다 됐네요. 됐습니다.. 하고 너무 자상하게 설명해주시길래.
어머. 나 이 시간에 여길 매일 와야겠네요. 할뻔했다.
(그 뒤로 이 주간 매일 갔는데 다시 만나진 못했다.)
회사는 더 멋지다.
내가 이제껏 다녀본 어떤 회사보다도 좋다. 맘에 든다.
깨끗하고.
회사를 들어가자마자 커피를 파는데 1000원이고 되게 맛있다.(스타벅스 아웃.) 이것만으로 50점.
쉴
자리에서 일하다 답답하면 노트북 들고 나와서 일할 수도 있고.
곳곳에 위치한 회의실 같은 룸에서는 수시로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또 금방 주제가 다른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아주 예전에. 구글에 아는 분이 있어 점심 초대를 받아 가시는 상사를 따라. 꼽사리 껴서 그 회사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는데.
입이 딱 벌어지는 문화충격. 이였던 기억이 났다.
점심마다 근사한 뷔페가 차려지고. 미리 얘기를 해놓으면 지인을 두 명까지 초대할 수 있는 구조였는데.
정말 맛있는 식사가 제공됨은 물론. 곳곳에 설치된 간식 부스에. 여기저기 정말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에. 아니. 여긴 정말 뭔가.. 했던 기억이 났다.
회사 사람들이 공통으로 쓰는 벽 위 낙서장에는 "누구는 정말 멍청이.."라고 쓰여있길래. 누구가 누군데요 했더니. 사장님이시라고..
예? 사장님 보시면 어쩌시려나요.. 했더니 사장님이 한국말을 몰라서 괜찮다고.
그러니까 거진 10년 전의 그 일이 왜 생각났냐면.
아쉽게도 구글만큼은 솔직히 아니지만. 지금 이 회사의 분위기가 마치 그 회사의 이런저런 부분들을 떠올리게 했던 거 같다.
수백 명의 직원들이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아 각자의 일을 하고.
가끔 의견들을 주고받으며. 조절하며 조용히 일한다.
양복을 입은 사람은 정말 찾기가 오히려 힘들고.
하늘색 면바지에 나이키 티를 입는다거나. 면바지에 남방. 티셔츠. 암튼 자유롭다.
대부분 운동화 차림인데. 그저 평범한 운동화보다는 대부분 각자의 취향을 확실히 드러내는 디자인의 신발이나 옷을 입고 있다.
어쩌면 그저 캐주얼을 입는 회사. 일수도 있겠지만.
내 평생 '직장인은 정장!'의 공식만 접해보다가 이렇게 자유로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그 옷차림만으로도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다.
첫 출근일엔 그래도 예의를 갖춰야지 하며 정장을 하고 갔다가.
둘째 날부턴 면바지에 남색 마이. 스니커즈화를 신고 갔다.
그 뒤로 쭉 신발은 운동화. 옷은 면바지에 남방. 티. 바바리. 카디건... 등으로 점점 편해지고 있다.
근데 그것만으로도. 출퇴근길이 훨씬. 정말 훨씬 덜 피곤하고 가볍다. 일하는 중에도 편하고.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일할수 있다는 게 정말 좋다.
(제가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편한 캐주얼 차림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이었으면 좋겠다. 가 있었습니다.. )
암튼. 출근길도. 회사도. 심지어 아침 맥모닝을 대신 주문해주던 '지나가는 남자'조차 친절한 이 곳에서.(회사 근처에서)
나는 비록 '알바'지만.
뭐 어찌 됐든 석 달은 기분 좋게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일을 하는 언니들은 나보다 10살이나 더 많으신 왕언니분들이라 역시 내공의 레벨이 좀 다르고 편안하시다.
그중에 한 분은 예전에 나와 같은 조직에 계시다 퇴직하신 분이라 맘도 잘 맞고 옛 얘기도 하면서 재미나게 지내고 있다.
우릴 담당하시는 부장님도 참 친절하셔서. 컴퓨터를 참 무식하게도 모르는 우리에게 친절히 설명도 해주시고 이끌어주시길래. 수줍게 유기농 미숫가루를 사다가 자리에 놓아드렸다.(여기 분들은 모두 컴퓨터... 를 다루시는 분들이라.. 버벅거릴 때마다 정말 주눅이...)
내가 이런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딱 지금의 알바일 뿐이겠구나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곳에 다니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이런 옷차림으로. 이런 여유 있는 사람들과 일을 한다면. 그래도 좀 버티면서 오래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신랑에게 회사 얘기를 했더니.
"우리 애가 그런 회사를 다녀야지.." 하길래. 아 그렇구나. 그러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아참. 그 시크 부장님은 2주 동안 한 번도 뵙질 못하다가 지난 금요일에 지나가시는 모습을 슬쩍 뵈었다.
좀 날카로운 인상이셨는데. 어차피 나야 기억도 못하실 것 같아 얼른 숨어버렸다.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분이 이 수십 명. 아니 어쩌면 이 수백 명의 직원을 총괄하시는 분이라. 꽤 높은 직급의 분이셨고.
어엄청 바쁘셔서 정말 얼굴 뵙기도 힘든 분이었다.
그때 그 시크하심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고.
부디 내 시크질은 진작에 잊으셨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