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랜 바람. 목수. 시작.
토요일이었다.
신랑은 일찌감치 나가 집에 없었고.
딸아이는 학원 가기 전에 숙제를 끝내야 한다며 부지런히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나는 한없이 늘어져 있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일을 끝내고 드디어 이사를 마치고.
며칠을 짐 정리를 하며 쓸고 닦고 버리고를 반복하다.
이제는 대충 치워진 집에 우두커니 앉아 내리쬐는 햇빛을 반기며 외출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고 신랑이 직장으로 향하면. TV 앞에 앉아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며 화면을 보다가 허공을 바라보곤 했다.
허기가 지면. 두세 숟가락 밥을 물에 말아 김을 꺼내놓고 후룩 마시듯이 허기만 때웠다.
일만 끝나 봐라.. 이것도 알아보고. 저것도 배우고. 잔뜩 맘속으로 벌여놨던 일들은 둥실둥실 허공에만 맴돌고 나는 또 금방 끝도 없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져 있었다.
나란 인간은 항상 그래 왔다.
토요일 오전이었고 9시가 갓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몇 년 전부터 막연히 나무를 다루는 일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손으로 나무를 만져 무언가를 만드는. 말하자면 목수의 일에 대한.
우연히 잡힌 잡지의 어느 페이지에서 목수일을 가르치는 공방을 접했었고.
나는 그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해 뒀었다.
숙제하는 딸아이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창가에 서있다가.
그저 이렇게 늘어져 있어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저장된 번호를 찾아 눌렀다.
"저.. 상담을 할 수 있을까요..?
위치가 어디쯤인지..
예? 오늘 당장이요?.."
오늘 당장 시작하는 수업이 있다고 했다. 11시에 시작하니 10시 반까지 오면 이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나는 앞뒤 생각 없이 알았다며 전화를 끊고 샤워를 하고 뛰어나가 택시를 잡았다.
아이에겐 학원차 늦지 않게 시간 맞춰 잘 다녀오라고 말해놓고.
기사님께 주소를 말씀드리고 나니. 주소에 나와 있는 동네 이름조차 생소했다.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기사님도 동네가 생소하신지 물어오셨다.
"목수요.. 목수일을 배워보려고요.. 저도 어딘지 잘 모르겠어서.. 근데 빨리 가야 해서 택시를 탔네요.."
놀란 얼굴로 나이 지긋하신 기사님이 나를 뒤돌아보신다.
"예? 여자분이 목수요..?"
주소를 찾아 택시에서 내렸을 때. 그곳은 약간 시골 같은. 어딘가에서 가축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 그런 곳이었다.
다행히 식당이 몇 군데 보이고. 주택이 있고. 한쪽에 버스종점이 있는.
그리고 그 주택가 살짝 안쪽으로 천장이 높은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가 그곳이었다.
10시 반이 살짝 지나 있어 급한 맘으로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겉에서 봤을 땐 그저 천장 높은 가건물처럼 보였는데.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 내부의 모습을 보니 제대로 나무를 가르치는 공방이란 확신이 들었다.
2층에 올라 사무실에 들어가니 이미 도착한 학생들이 한두 명 보였고.
막 강의를 시작하시기 전이라 미처 상담을 할 시간도 없이 신청서만 작성하고 자리를 잡았다.
토,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5시까지 수업. 그 이후에 7시까지 자유작업.
우선 이론수업과 실기를 병행하며 나무와 기구, 기계에 대한 지식을 익히고.
3주차부터는 각자 만들고 싶은 가구를 직접 스케치하고. 나무를 선택해서 주문한 뒤. 제작에 들어가. 완성한다! 가 이 수업의 목표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내 발로 뛰어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였지만.
나는 불과 1시간 반전에. 학원가는 딸아이의 아침밥을 차리고 있었는데.
아침 먹으며 숙제하는 딸아이를 쳐다보다 마루로 나와 TV를 켰던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왜 갑자기 그 번호를 생각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던 걸까. 하필 오늘.
수업은 좋았다.
각자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다 보니.
직장을 다니던 중에 관심이 있어 주말반을 등록한 젊은 총각도 있고.
곧 공무원 생활을 정년퇴직하신다는 선생님도 한분.
이미 설치작가이나 나무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러 왔다는. 시크하게 담배를 즐기는 보이쉬한 여성분.
디자인을 전공했으나 10년째 번역을 하다 방구석에 혼자 앉아 작업하는 게 답답해 돈 쓰러 나왔다는 새댁.
이왕 할 거 일찌감치 배우는 게 좋겠다 싶어 시작하게 됐다는 20살 막내.
아버지 드릴 멋진 의자를 만들고 싶다는 어여뿐 처자.
이미 목수이고-목수 일당이 하루 25만 원이라네요-자영업을 하신다는 남자분.
IT와 나무를 접목한 스타트업을 한다는 젊은 사업가.
의전을 다니는 학생이나 요즘 살짝 여유가 생겨 친구 권유로 오게 되었다는 이쁘장한 오빠.
3년 다닌 직장 때려치우고 3개월째로 접어들어 불안한 맘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그래서 새로운 걸 절실히 찾는듯한 탐색자.. 등등.
각자의 사연들이 흥미롭고 재밌었다.
어찌 됐든 우리는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이렇게 여기 이 자리에 모여있었다.
반가웠다.
같은 관심사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저 친근감이 들고.
어느 누구 하나 나무라는 것에 열정을 갖지 않은 이가 없었다.
두 시간의 이론 수업 끝에 이어지는 실기 시간이 되면 시간이 언제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몇 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나무를 고르고. 톱질을 하고. 끌질을 하고. 톱의 날을 갈고. 기계 다루는 방법을 익히며 집중하는 열정의 시간.
쌀쌀한 날씨에 톱밥을 흠뻑 마시며 몸은 한껏 피곤해졌지만.
어둑해진 시간에 온 몸에 쌓여있는 누런 톱밥을 털며 공방을 나오며 마시는 공기가 더없이 상쾌하고 나른하고. 피곤하고. 또 행복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살이 1킬로씩 빠져있었다.
이번 주는 벌써 3주 차다.
토요일 수업에 각자 만들고 싶은 가구의 디자인을 해오기로 되어있고.
선생님께 갓 배운 도안 법을 활용해서 어떻게든 도안을 그려가야 한다.
허. 나 실은 어떤 가구를 만들지도 정하지 못해 3일 동안 끙끙거리다.
어제부터 무작정 그려보고 있다.
마루에 놓을 탁자.
책을 놓을 수 있는 사다리식 책장.
커다란 서랍이 세 개 꽂힌 서랍장.
심플하지만 약간의 곡선이 있는.
튼튼하고 실용적인.
내가 당장 필요한.
사용하며 행복해질 가구.
매일매일 사용하고 쓰다듬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애착이 갈.
내 가구.
엊그제 우연히 TV에서 김미경 씨의 강의를 봤다.
언젠가 이루어질 미래의 꿈. 혹은 이미 이룬 꿈들의 시작은 언제였을까요.
강사는 내년에 이태리로 3개월 유학을 간다고 했다.
수십 년 전에 동대문에서 이쁜 천을 끊어다가 재봉틀로 드르륵 옷을 만들어 입던 그 순간이.
옷에 관심이 많아 유학까지 가게 된 이 꿈의 시작이었다고.
강의를 하게 된 이 현실의 시작은.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학원에 대한(피아노 강사셨죠. 이분) 성공 노하우를 발표하던. 그 얼떨결의 순간이었다고.
본인이 아는 60대의 지인은.
평생 꿈꾸던 배낭여행을 가기 위해 영어공부를 시작했고.
그렇게 배낭여행을 떠나.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을 또 배우고.
사진작가가 되고.
그 사진을 실은 여행기를 써서 작가가 되어 책을 출간하셨다고.
내가 시작하는 목수 공부는.
내 삶 어느 쯤에 어떤 꿈의 결과로 나타날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오랫동안 가슴속에 간직했던 나무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저질러버렸다.
마침 그 토요일. 통장엔 내 마지막 알바 월급이 들어와 있었고.
이 마지막 월급만큼은 나를 위해 쓰고 싶었던지도 모르겠다.
멋진 체크 코트를 한벌 샀고.
목수 일을 할 때 입을 깔깔이 잠바도 하나 샀다.
만만치 않은 목수 수업료를 결제했고. 기본 장비들도 다 사뒀다.
내가 만들 가구를 위해 나무도 장만해야 한다.
그 토요일.
오랫동안 바라왔던.
내 작은 꿈이 하나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