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깼어요. 우울하네요.
무리를 해서 이사를 하긴 했다.
훌쩍 오른 전셋값을 치르고서라도 아이를 전학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주변 너무 낡은 아파트로는 차마 가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몇 년이나 전에 가입한 연금을 깰까 말까 망설이다. 신랑의 배려(처음엔 지독히 우울해했다..)로 신랑의 마이너스통장을 듬뿍 덜어다가 주인집에 가져다 드리고서야 이곳에 이사를 올 수 있었다.
그 외 입출금에 있던 여유자금은 바닥까지 박박 긁었고.
쬐끔 갖고 있던 펀드도 다 환매하고.
당장 다음 달 자동이체 빠질 여유 자금조차 생각할 여유 없이 싹 쓸어다가 모아 모아 드렸다.
이사를 하고 돌아온 첫 카드 결제일 날.
어마어마 돌아온 카드값(이사비용이 들어가 있으므로)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신랑의 보너스가 슬슬 들어올 시기라는 감이 있어 이번 달만 어찌어찌 잘 넘어가 보자 다짐을 했건만.
요즘 영 실적이 좋지 않다며. 술주정과 짜증이 늘어난 신랑의 회사에선. 꽤 여러 달 동안 보너스를 주지 않고 넘겨버리고 있었다.
기분이 영 안 좋으신 왕서방(신랑네 회사 보스를 우린 이렇게 부르곤 한다) 맘이시란다.
실적이 안 좋아 짜증이 나 있으셔서 이쯤 되면 한번 쏴주셔야 할 보너스를 빌미로 사람 목을 휘두르고 계신 모양.
그동안은 어찌어찌 살아왔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건 어찌어찌 살아온 게 아니라 그저 생각 없이 갖고 있는 돈을 쪼개어 티 안 나게 나눠 쓰고 있었던 거였지만.
퇴직하면서 얼마간의 돈을 여유자금 통장에 넣어놓고.
신랑의 월급 평달에 돈이 좀 모질라면 그 돈을 야금야금 꺼내 썼었다.
당장 자동이체로 빠질 적금들도 상당했고. 그건 뭐 다시 어딘가에 쌓이고 있는 것이니 없어지는 돈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근데. 그 자동이체 금액 말고도.
어느 달 카드값이 좀 많이 나오면. 그것도 그 통장에서 빼다가 보태고.
어느 달 여행을 갈 일이 생기면 그 자금도 거기에서.
여행 가시는 부모님 여행 용돈도 좀 넉넉히 빼서 드렸다.
그러니까. 그 여유자금 통장은 애초에 적금 자동이체를 위한 당분간의 여유자금이었고.
나머지 생활은 당연히 신랑의 월급만으로 지탱을 해야 했건만.
나도 모르게 그 여유자금을 뭉텅뭉텅 쓰며 없애고 있었단 얘기다.
당장 지금.
'여유자금 통장'의 자금이 없어진 데다.
왕서방의 변덕으로 보너스 지급이 멈추고.
나는 아이 옆에 딱 붙어있느라 알바도 못 나가고 있고.(들어오는 일도 없다.)
신랑의 평달 월급 외에 도는 자금이 없자.
가슴이 답답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알뜰치 못한 신랑의 씀씀이도 대충 얼버무려 봐주고 있었는데.
본인 급여의 30% 이상을 아무 생각 없이 써버렸던 달에는 진지하게 짜증을 내며 정신 차리라고 했다.
사춘기 시절 시아버님의 부도로 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신랑은. 잔고 없는 통장 자체를 무척 불안해했지만.(잔고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무시무시하게 밑으로다가..쫙.)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신 차려야지 별도리가 있나.
이보게.
우리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소.
정신 차리소.
슬슬 사춘기를 맞이하며 예민해지는 딸 옆에 붙어 열심히 비위를 맞추며 지내느라 당분간 알바도 보류 상태였다.
엄마가 옆에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TV를 틀어놓거나 동영상을 틀어 놓고 멍하게 있는 시간이 많은 듯했다.
늦게까지 혼자 있어야 하는 상황을 무서워하기도 했고. 스트레스받아했다.
아이를 달래고 얼래서 좀 맘이라도 푸근하게 쉬었다 갈 수 있게 나는 항상 대기상태였다.
학원에서 미처 다 외우지 못한 단어들 때문에 보충수업이라도 받게 되는 날이면. 옷을 챙겨 입고 어둑한 길을 달려 아이를 데리러 갔다.
게다가 나는 뚜벅이라. 30분 전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아이의 학원 앞에 미리 도착할 수 있었다.
(보충 뒤엔 버스 운행을 해주지 않는다. 진심 제기랄.)
근데 막상.
상황이 하필.
이것저것 기가 막히게 맞물리며 돈이 딱 떨어지자.
어어. 이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불안감이 엄습했다.
적어도 이제껏 모아둔 거(뭐 별로 없지만)를 빼먹고 살아선 안되지 않나.
내가 이제 40초 반이고. 저 늙은 신랑은 40 후반이지만.
아직 아이가 초등생이고.
우린 아직 갈 길이 멀고 먼 늙은 중청년(?)이 아니던가.
지난달엔 기어코. 갖고 있던 보험 중에 하나를 중도해지했다.
도저히 돈을 만들어낼 여력이 없었고. 마이너스 통장에서 돈을 더 빼 쓰는 게 더 불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금액이 아주 큰 건 아니었지만.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만기가 다가오는 아이였건만.
며칠을 고민하다 첫 '중도해지'를 해 놓고 맘이 영 찝찝하고 언챦았다.
어마어마 카드값도. 그간 몇 년이나 모아 왔던 마일리지를 현금으로 전환해서 한 달치를 해결했다.
아. 그 마일리지는. 마일리지로 썼더라면 그 두세배 가격의 비행기 티켓을 살 수 있는 거였다만. 과감히 포기하고.(이 마당에 무슨 여행이란 말인가 싶어) 어마어마 카드값을 상환해버렸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달까.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일어난 이 살짝의 흔들림으로.
맘이 막 요동치며 불안감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 마시고 들어와 쓸데없는 주정을 하는 저 신랑이.
아니. 저 인간. 직장에서 위기감을 느끼나. 왜 자꾸 저런 불안한 주정을 해대는 거지.. 하며 귀를 쫑긋 주정을 분석하게 되고.
지난번 나를 붙잡으며 알바 연장하자고 하던 직원분들과 언니들께 시크하게 거절하고 나온 내 모습이.
왜 그랬니. 건방지게 왜 그랬니. 공손하게 더 하든가. 어쩌자고 시건방진 이미지로 나온 것이냐 자학을 한다던가.
아이가 스스로 요리를 해보겠다며 인덕션을 사달라고 조를 때.
생각을 해보자. 엄마가 요즘 돈이 없어. 우린 가난해.. 하며 심각한 얼굴을 했더니 덩달아 불안해하던 딸아이의 얼굴...
왜 그랬을까... 좋게 말하지.
그래도 명절이나 어버이날, 생신날. 나름대로 무리해서 드렸던 부모님 용돈을.
이번엔 얼마를 드려야 하나.. 금액을 자꾸 수정하고 있다.
신나서 배우고 있는 목공일도. 이게 지금 나한테 사치..인 건가. 아니겠지. 그런 거지..? 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다가도.
같이 배우는 다른 이들이 벌써 목공 관련 일들에 대한 본인의 계획들을 말하고. 또 일부는 이미 진행시키기도 하는 걸 보면서.
이거 참. 나만 흠~하고 있었구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로 뭔가 시작을 해보리라 이미 맘을 먹고 들어온 이들이 여럿이었다.
주말에 종일 목공일을 배우고 돌아오면.
주중에 계속 손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나무를 다루는 게 재밌기는 했지만.
나는 당장 이 일로 뭘 해봐야겠다 하며 현실적인 계획은 세워보질 않았었다.
그저 재미있어 죽겠다. 정도랄까.
솔직히 아주아주 위기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걱정인형이 불쑥불쑥 올라와 나를 괴롭히는 이 불안감들은 결코 유쾌하진 않다.
물론 내겐.
비록 전세이나 살고 있는 집도 있고.
몰지는 못하나 가끔 주말에 얻어 타는 차도 있고.
가전제품, 살림살이도 남들만큼 있고.
갖고 있는 오밀조밀한 보험들과 약간의 연금도 있지만.
이거는 어디까지나.
이제껏 모아 온 내 소중한 도토리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방법은. 방법을 찾자.
우선 가장 좋은 건 신랑네 왕서방님이 어서 짜증을 풀어 자금을 좀 푸시던가.
딸아이를 잘 달래 내가 다시 알바를 시작하던가.
쓸데없는 지출을 없애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던가.
지금 배우는 이 목공일에 대해 좀 심각한 고민을 해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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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좀 돼주던가.
..
나 정말 알뜰하게 쓸 수 있는데.
흥청망청 아니고.
정말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