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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Jul 10. 2017

퇴직 3년 차 되는 날

아무래도 적성이 전업주부는 좀...


 아침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샤워를 하는 남편의 기척을 듣고 나도 주섬주섬 일어난다.

 딸아이는 꿈틀거리며 일어날 듯 말 듯 지 혼자 짜증을 내고 있고.

 머리띠 질끈 매고 대충 세수를 하고 나면 커피부터 내린다.

 얼음 둥둥 띄워 대자로 한잔 해놓으면. 우선 한 모금 내가 마시고. 좀 있다 남편이 두 모금 마시고.

 나머지는 찬물 더 타서 텀블러에 넣어 출근하는 신랑 배웅하며 배낭 안에 넣어준다.

 

 토스트를 한두 쪽 구워 잼을 바르고 한입 크기로 잘게 잘라둔다.

 과일도 있으면 한두 개 잘라놓고 포크를 걸쳐둔다.

 남편과 딸아이가 분주하게 준비하며 오고 가면서 한두 개씩 먹을 때도 있고. 여유 있으면 다 먹기도 하고. 아예 한 개도 건드리지 않는 날도 있다.

 

 딸아이는 찬물을 담아 책가방에 꽂아줘야 한다.

 그냥 책상 어딘가에 올려놓으면 챙겨가는 걸 잊어버리고선 다녀와 내게 물 안 챙겨줬다며, 그 덕에 얼마나 목이 말랐는 줄 아느냐며 짜증질을 하기 때문에 꼬옥 가방 오른쪽 구멍에 쏙 넣어줘야 한다.

 

 가끔 와이셔츠 다린 게 없으면 급하게 와서 다려달라고 하지만.

 내가 다림질 싫어하는 거 잘 아는 신랑은 대게 본인이 주말에 몇 개씩 미리 다려놓는다.

 

 남편이 갈 때 손수건 챙겨주고. 핸드폰 깜빡할까 한번 더 물어보고.

 딸아이 갈 때 머리 한번 빗겨 삔 꼽아주고.

 문밖으로 나가며 손 흔들면 끝.

 

 비가 쏟아지듯이 내리는 날에도 세탁기는 돌려야 한다.

 도저히 저 빗속을 뚫고 어딜 가기도 힘들어 보이는 날일지라도.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해두지 않으면 당장 쓸 수건마저 똑 떨어진다.

 아침저녁으로 씻어대는 남편과.

 중간에 발 닦기용 한 개, 저녁에 샤워용 한 개를 해치우는 딸.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씻는 나.

 이렇게만 치더라도 수건은 하루 5개가 소비된다.

 그에 따라 나오는 양말이 3-4개, 빤스 3개, 러닝, 티셔츠, 바지까지.. 줄줄이 던져놓다 보면 금세 한 뭉탱이.

 

 장마철엔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

 중간에 잠깐 비가 멈추고 해라도 살짝 뜨면 좀 덜하지만.

 오늘처럼 종일 우중충한 하늘로 퍼붓듯이 쏟아지는 소나기엔 절대 한구석도 말려지질 않는다.

 

 요즘 젊은 엄마들(아. 나 자꾸 이런 말 쓴다. 제길.)의 인생템이라는 '건조기'가 있으면 정말 좋겠구나.. 하면서도.

 뭐 또 별로 사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부지런히 선풍기를 틀어놓고 말린다.

 억지로라도 바람을 쐬어 반쯤이라도 건조하여두지 않으면 당장 쉰내가 나는 매우 찝찝한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

 막상 쉰내가 폴폴 올라오게 되면 달리 방법이 없다.

 그땐 무조건 삶아내야 한다.

 냄비에 세재 넣고 수건 넣고 끓어넘칠까 내내 바라봐야 하는 그 일이 내겐 좀 수고스럽다.

 물론 삶고 나면 말끔한 냄새가 나서 좋아들 하긴 하지만.


 세탁기 돌리고. 마른빨래 개키고. 다시 젖은 빨래 널고.

 집안 돌아댕기면서 아이가 던져놓은 옷들 치우고.

 어지러워진 이불 정리하고.

 청소기 돌리고.

 너무 지저분하다 싶으면 걸레질까지.

 그러고 나면 주부로써의 일은 대충 마무리.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2시 반까지 나는 자유다.

 2시 반에 들어와 "간식, 간식~!!"을 외치는 딸아이에게 맛난 거 한상 차려주고 나면 또 금세 다른 가방 고쳐 메고 학원으로 달려간다.

 그럼 다시 6시 반-7시까지 나는 자유.

 

 나는 여기까지.

 내가 할 일은 이게 다다.

 그러니까 이 패턴으로 매일매일이 돌아가고 있다.

 



 며칠 전 6월 30일은 내 퇴직 3년 차가 되는 날이었다.

 3년의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새로운 걸 배워보기도 했고. 간간히 연락받고 알바도 나갔었다.

 같이 퇴직한 동기들끼리 주기적인 만남도 가졌었고.

 예전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들과도 가끔 만났다.

 동네 엄마(딸아이 친구들의 엄마) 모임에도 끼어보려 노력했으나 처절히 실패했다.

 배웠던 모든 것들이 재밌었으나 그 일들은 뭔가 새로운 '일'(일거리)로 연결되진 못했다.

 나는 계속 무얼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해야 했고 지금도 고민 중이다.

 

 3년 차가 되는 날 아침. 뭔가 허전했나 보다.

 오늘만큼은 부지런히 하루를 보내야겠단 다짐을 하고.

 전에 없이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미뤄뒀던 일을 해치우기로 했다.

 하나씩 깜빡이며 생을 달리 한 전구들을 교체하기 위해(전구를 갈아봤는데 소용없었으니 이것은 그 안전기인가 뭔가를 교체해줘야 하는 거다)-안전기를 교체하기 위해- 관리실에 전화를 했다.

 봐주시는 기사분이 오신다기에 언제쯤이냐 물어봤더니.

 기사분이 너무 바쁘셔서 순차적으로 가실 거라고. 기다리라고만 했다.

 사람처럼 옷을 입고 집을 치워놓고. 혹시 더우실까 싶어 에어컨도 틀어놓고. 음료도 준비해놓고.

 언제 오 실지 모를 기사님을 우선 기다리기로 했다.

 생각 외로 일찍 와주신 기사님께서 솜씨 좋게 천장에 달린 등을 하나하나 떼어 전구를 이리저리 갈아 테스트를 하신 뒤.

 완전 맛이 간 안전기(전구 옆에 있는 작은 뭔가를 그렇게 부르셨다)를 하나씩 교체해주셨다.

 이방 저방 갈다 보니 거진 8개의 전구와 안전기가 교체되었고.

 어둑하던 집이 몰라보게 밝아져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마침 고장 난 다용도실 문고리도 말씀을 드렸는데.

 그건 또 다른 분이 오셔야 한다고 하시면서.

 문고리를 하나 사다 놓고 다시 전화를 하라고 하셨다.

 

 

 상가에 나가 두 번째로 저렴한 문고리를 하나 사고.

 오늘은 특별히 3년 차가 되는 날이니.

 단정하게 밥다운 밥을 먹어야지 하는 맘에.

 상가 돈가스 집에 가서 정식을 시켜 말끔하게 먹어치웠다.

 

 장까지 봐서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3통이나 걸려왔는데.

 문고리 봐주시는 기사분이 너어무 바쁘셔서 늦게 오실 수 있다고 했다가.

 오늘은 도저히 안된다고 하시길래.

 부탁에 부탁을 드리며 꼭 오늘 와주셔야 한다고 졸랐다.

 

 다용도실 문고리가 덜렁덜렁 거리는데.

 세탁기 돌린다고 나갈 때는 잘 열렸다가.

 세탁기에 빨래 넣고 이것저것 마무리하고 들어오려다 닫힌 문을 못 열어(고장 난 걸 까먹구선 닫아버리고) 갇힌 일이 여러 차례였다.

 (한 번은 저절로 꽝 닫혀버려 망연자실하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구출해줬다)



 겨우겨우 알았다고 하시는 직원분의 전화를 끊고 냅다 집으로 달려와 기다렸는데.

 바쁘신 와중에 특별히 들러주신 기사분이 바로 도착하셨다.

 그분은 작은 키에 몸이 탄탄하고 무뚝뚝한 표정이셨는데.

 한쪽 눈이 좀 불편해 보이시는.

 어찌 보면 좀 무서워 보이시기까지 한 첫인상이셨는데.(죄송합니다..)

 들어오시자마자 한쪽 손에 척 보쉬(내가 갖고 싶어 하는) 전동드릴을 장착하고 단숨에 문고리를 뜯어내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아이고. 바쁘신데 이렇게 부탁드려서 죄송해요.. 제가 해보려고 동영상도 찾아보고 했는데 도저히 잘 모르겠어서.. 혹시 저 가르쳐주시면 다음부터는 제가 교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가르쳐 주실수는 없을까요.. 했더니.

 어찌나 해맑게 웃으시며 차근차근 가르쳐주시는지-물론 너무 바쁘셔서 손은 엄청 빠르게 움직이셨지만-나름 나 혼자 괜히 감동.

 물 한잔 시원하게 드시고 일끝 내고 나가시는데 다음에도 고장 나면 또 부르시라며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아. 난 전동드릴 잘 다루는 남자는 다 멋져 보이니 이를 어쩌나.


 



 그 날은 그렇게 갔다.

 전등 8개 고치고 문고리 하나 고치고.

 돈가스 정식 먹고.

 집안 청소하고. 화장실 청소하고.

 딸아이 간식 먹이고.

 저녁 차리고.

 

 그나마 미뤄뒀던 일 해치웠더니 좀 개운하긴 했다.

 

 

 도대체 다른 전업주부들은 무얼 하며 지내는 걸까.

 중간중간에 엄마들끼리 모임도 하고. 뭘 배우기도 하고. 쇼핑도 하고.

 아이 챙기며 간식 주고. 혹은 학원에 차로 라이드 하며.

 하루하루를 "아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어~~" 하며 뿌듯하게 하루를 마감하는 걸까.


 딸아이가 들으면 무척 서운하겠지만.

 나는 지금의 이 생활이 막 뿌듯하거나 보람차진 않다.

 물론, 가끔. 딸아이가 아파서 학원에 못 가고 병원에 데려가야 할 일이 생기거나.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에 앉아있다 학원차를 놓쳐 직접 데려다줘야 한다거나.

 학원 보충 때문에 버스가 없어서 데리러 가야 할 일이 생길 때면.

 아.. 내가 집에 없었으면 어쩔뻔했어.. 하는 맘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그저 그때뿐이다.

 

 내가 만약 딸아이 없이 온전히 나 혼자만의 하루를 보내는 여자였더라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애초에 어쩌면 직장에서 퇴직을 안 했을 수도 있다.

 여전히 그 생활에 찌들어 스트레스받으며 쳇바퀴 돌듯 일을 해왔을 수도 있고.

 퇴직을 해서 지금의 나로 있었더라면.

 아마도 훨씬 빡빡하게 뭔가를 배우고 있을 것 같다.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목공일을 전문적으로 배우고자 1년 코스를 신청해 평일 매일매일을 공방에서 보내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혹시 아이가 없이 부부만 있었더라면.

 지금의 생활비의 반도 들지 않았을 테니 1년 수업료가 부담스럽다거나. 시간이 없다거나 해서 망설일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아이의 엄마로 살고.

 남편의 와이프로 살며.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하는 삶 외에.(실은 요즘 밥하기도 싫다.)

 

 내가 내 밥벌이를 스스로 하지 못하는 기간이라는 게 짜증 나고.

 뭔가를 시원하게 한껏 쏟아부으며 배울 수 있는 여력이 부족하다는 게 답답하고.

 실은. 이 모든 게 핑계일 수도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질책.

 이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우울해하기도 한다.

 

 

 "내가 이번에 번 돈으로 뭐 사주까.." 하며 신랑을 데리고 할인매장에서 제일 근사해 보이는 옷을 기분 좋게 골라주는 입장과.

  "여름 양복이 없어서 봄가을꺼 입구 다닌다.. 니 알바해서 나 여름양복 사줘.."라고 말하는 신랑은 매우 꼴보기 싫어지는 이 입장은.

 뭐랄까.

 뭐라고 해야 할까.

 

 알바들어와 할까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한번 해봐" 하고 신랑이 말하면 서운하고.

 "그럼 하지 마. 딸 챙기구 집에 있어." 하면 가증스럽고.

 "어쩌란 거야. 어차피 니 맘대로 할꺼면서." 하면 짜증 난다.

  뭐랄까.
  뭐라고 해야 하나.

  나 그저.. 지랄 맞은 걸까.

 

 나는 뭔가 내 일을 하지 않으면 자존감이 낮아진다.

 신랑이 돈을 매우 많이 벌어와 명품가방을 안겨줘도 소용없다.(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미안하지만. 딸아이만 바라보며 열심히 뒷바라지하는 것도 가끔씩 뿌듯하긴 하지만. 완벽한 만족감을 주진 못한다.

 나는 계속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보다는

 "나... 뭐하며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서점을 서성거리다 우연히 구석에서 발견한 책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저녁 7시, 나의 집밥>-유키마사 리카-)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밥을 만들고 커피를 내리고 집을 정리하고, 몸을 움직여 어딘가로 갑니다. 벚꽃이 피면 꽃구경을 가고, 여름이 되면 아이들을 풀장이나 축제에 데리고 갑니다. 밤이 되면 술을 마시면서 먹고 싶은 걸 만들고, 때로는 친구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평범하고 어쩌면 당연한 일들이지만, 그것은 다양한 우연이 겹쳐 성립된 아주 귀중한 시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순간을 꼭 껴안으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인생이란 건 분명히 그 순간순간이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것일 테니까요."

 

 

 

 아. 나와 비슷한 생활을 하는데 어찌 이리 다른 마음이란 말인가.

 나는 아무래도 전업주부가 적성은 아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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