싶을 땐 쇼핑
딸아이의 방학이 시작됐다.
딸아이는 징징대며 심심하단다.
삼시 세끼 꼬박꼬박 집밥이 최고 맛있다며 반찬이라도 한두 가지 사가지고 와 밥상에 올려주면. 설령 그게 고기반찬일지라도 잔소리 작렬이다.
니가 감히.
니 아빠도 하지 하지 않는 밥투정을 내게 하는 것이냐.
이 더운 날에 불 앞에서 밥을 하는 심정을 알기는 아는 것이냐.
알리가 없지.
냄비 한번, 프라이팬 한번 올리고 지지고 나면 온 몸이 땀범벅이 되어 그놈의 '한 끼'를 차리게 된다는 것을.
그래도 외식은 줄여야지.
이 더운 날에 돈 벌어와 식구들 먹여 살린다고 아침마다 "아 언제까지 다녀야 해... "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척 출근하는 저 불쌍한 신랑을 위해서라도.
돈을 아껴써야지. 아껴써야지. 아껴써야지....
하.다.가.도.
사람이 말이지.
돈을 못 쓰면 우울해진다고.
인생 뭐 있겠어.
맛난 거 먹고. 사고 싶은 거 사고. 잘 자고. 잘 싸고.
이게 다라고.
딸아이를 데리고 하이마트에 갔다.
작년 겨울부터 인덕션 자그마한 거를 사달라고 그리 졸라댔었는데(가스불은 무섭단다.)
그게 가격이 만만치 않아 다음에. 다음에를 외치다가.
아냐. 다른 집 애들은 방학이라고 외국에 있는 캠프도 보내고 멀리 해외여행도 다니고 할 텐데.
그런 경험은 못 시켜줄 망정 이거 하나 안 사주는 건 이거 너무 한 거 아닌가.
당연 새로운 경험이 될 '요리'에 취미를 붙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편해질 것인가!!!!)
그게 또 아이의 평생 업이나 취미가 될 수도 있을 일인데.
막상 사러 가서 보니 여기저기 세일가를 붙여 잔뜩 행사 중이었고.
이쁘장한 인덕션 하나를 보긴 했는데. 그게 인덕션에 맞추어 냄비, 프라이팬을 모두 바꿔야 한다는 설명에.(아니. 뭐라고요.)
인덕션과 아주 흡사한 '전기레인지'를 집어 들었다.
가격도 인덕션의 1/3 수준이라 10만 원 정도에 구매할 수 있었고.
애미도 모르는 인덕션과 전기레인지의 차이점을 알리 없는 딸은 방방 뛰며 좋아해 줬다.
자. 이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우린 오늘. 쇼핑을 나온 거라고. 쇼핑.
딸아이를 아끼는 애아빠가 저얼대 먹이지 말라고 했던. 하필. 햄버거를 먹겠다고 딸아이는 졸라댔다.
아빠가 먹지 말랬잖아.
말 안 하면 되잖아!
아. 그렇구나. 우리 둘이 입 다물면 아빠는 모르잖아. 그럼 먹자.
아주 오래간만에 맛보는 와규버거는 왜 갑자기 고급진 맛인지.
둘이 맛있다맛있다를 연발하며 정신없이 흡입하는데 한껏 기분이 고조된 딸아이가 인증샷을 찍어 애아빠에게 보내버렸다.
어이.어이.
밥을 먹고 나오는데 백화점 지하 입구 근처에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게 보였다.
뭘까하는 맘에 들여다보니 지난번 딸아이 신기려던 단화(사이즈가 다 나가서 끝내 사지는 못했었다)를 반값에 세일하는 중이었다.
오. 오늘 제대로네.
골라. 우선 골라. 사이즈 다 있대.
딸 하나. 나하나. 색만 달리 해서 커플 신발을 골라잡아 계산을 해치웠다.
우리 후식을 먹었던가.
오늘 같은 날엔 제대로 된 후식을 먹자.
카페로 가는 거야. 서점 안 카페에 가서 좋은 경치 보며 갓 계산된 책들의 비닐을 뜯는 거지.
서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책 구겨질까 살살 넘기며 보는 거 말고.
딱. 사서. 그걸 카페에 데리고 가서 당당하게 보는 거지.
얼마 전에 공방에서 동기들끼리 밥을 먹으면서.
나무 얘기, 사는 얘기, 공방 얘기 등을 하다. 결국엔 돈이라고.. 에 결론이 다다르자.
로또 되면 뭐에 뭐에 쓰련다 한 마디씩 농을 던졌었다.
다들 각자의 바람 하나씩 던져내다가.
내가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할 것이다 계획을 말해보니.
다들 내게 '그럴 리가 있겠냐'며 야유를 보내왔다.
그게 그러니까 야유의 이유인즉슨.
내가 설령 로또가 된다한들 외제차 같은 거는 아예 관심이 없다고 했던 게 그 원인이다.
내가 몇 번을 반복하며 나는 정말 외제차 같은 거는 관심이 없다고요... 그러니까 살 리가 없다고요..(면허도 없다고요) 해봐도.
오히려 그럴 리가 있겠냐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며 믿어주질 않았다.
몇 번을 얘기하다 억울해서 말을 멈췄는데.
오히려 나는 좀 당황스러운 맘이었다.
언젠가 엄마들 커뮤니티에 어느 분이
"저는 명품가방엔 관심이 없어서요.."라는 댓글을 달았다가. 이런 소릴 들었다고 했었다.
"가식 떨지 마세요.."라고.
헉. 나는 이 얘기가 정말 쇼킹했는데.
나는 무수히도 많이 "명품가방엔 관심이 없어서요.. 잘 알지도 못하고.." 이런 얘기를 하고 다닌 사람 중에 하나여서.
이 얘기가 '가식'으로 비칠 수도 있겠단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질 못한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가 생각하는 사치가 있는 법이다.
그런 것이다.
엊그제 조카(남)와 딸을 놀리자며 언니를 만났다.
두 녀석은 약속을 잡으면 만나기 전부터 좋아 죽는 사이인데. 어쩐지 막상 만나면 잠시 어색한 시간을 갖고 좀 있다 익숙해져서 논다.
그래도 방학인데 영화 한 편 보여줘야지 싶어 애니메이션 영화표를 끊어 팝콘을 손에 들려 들여보냈다.
언니와 수다를 떨며 주변 상점을 돌아다니다.
아니 이런 녀석이!라고 할 만한 배낭을 발견하고 말았다.
패턴을 좋아하는 언니가 자주 구경 가는 브랜드인데.
알록달록 패턴이 미치도록 화려한 이 가게 한구석에.
거진 유일하게 패턴이 없고. 짙은 회색과 카키의 중간색으로.
지퍼 손잡이에 살짝 밝은 색의 가죽으로 포인트를 잡고. 오른쪽 어깨쯤에 그 암벽등반을 할 때 밧줄을 거는(이름을 모르겠어서 이렇게밖에는 설명을..) 야무져 보이는 쇠붙이 액세서리도 달려있고. 큼지막하고 튼실해 보이면서 은근 각이 잡혀 있어 흩트러짐 없는.
딱. 인생 가방을 만난 것이다.
아. 얄궂게도 이게 배낭치곤 좀 나가는 가격이라.
흘끗거리며 쳐다보고. 망설이고.
가게를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다.
뭐.
사버렸다.
이 가방은 딱 '목수 가방'인 데다가.(생긴 건 목수 가방인데 왜 비싼 것인가..)
'여행용 가방'이다.
언니랑 둘이 같이 홍콩에 갈 때 매면 딱이다!라는 설득하에.(홍콩에 갈 계획이 아직 구체적으로 있는 건 아닙니다만)
저질렀다.
심지어 내가 갖고 있는 어떤 가방보다 가장 비싸다.
배낭인데.
이쯤 되면 도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배낭이길래 하며 궁금해할 것 같아 썩 내키진 않지만 사진을 올려본다.
가방을 사니 여행이 가고 싶다.
너무 더워 고생스럽기만 한 여행 말고.
배낭 메고 돌아다니며 적당히 땀도 흘리고. 그늘에 쉬어 땀도 말릴 수 있는 산 쪽이면 좋겠다.
저 멀리 해외까지 아니더라도.
그 좋다는 속초나 부산, 강릉.. 지리산,.. 이런 곳.
인생 뭐 없다.
자존감이 훅 떨어지는 날엔.
이제껏 입어보지 않은 좋은 속옷을 사보자.
만원에 다섯 장, 일곱 장 하는 면 좋아 보이는 팬티 대신.
유니끌로(내가 가봤자 거기다)에라도 가면 요즘 세련되고 감각적인 속옷이 꽤 널려있다.
대신 한 장에 만원 가까이하는 애들이니 신중하게 골라내야 한다.
못 가본 곳도 너무 많고.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배울 것도 많고.
키워내야 할 자식은 아직 어리고.
끝없이 새로운 책이 나오고.
재미있는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계절은 계속 바뀌며 새로운 바람이 분다.
삶이 지루할 틈이 없다.
더울수록 몸을 움직여 밖으로 돌아다닌다.
그저 걸으며 돌아다니면서 세상 구경만 해도 마음이 활기차 진다.
게다가. 쇼핑은.
그중에서도.
아주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