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생각을 크게 키우는 사소하지 않은 태도에 관하여
"16년 차 카피라이터가 말하는
사소한 생각을 크게 키우는
사소하지 않은 태도에 관하여."
이 소개와 딱 떨어지는 내용의 책인데. 이 작가도 박웅현(<책은 도끼다>를 쓴) 사단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예전에 <모든 요일의 여행>, <모든 요일의 기록>이라는 책을 쓴 김민철이라는 작가도 박웅현 사단 중 한 명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분의 책도 무척 좋았어서 연달아 단시간에 읽어낸 기억이 있다.
박웅현 작가의 인문학 강독회는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좀 망설여졌었는데 부쩍 호감이 가는 요즘이다.
그의 사단에 있는 이들은. 그를 포함해 생각의 내공이 남달라 보인다.
"이 과정을 일명 '생각의 땅파기'라고 불러보겠습니다.
.. 어디가 깊게 들어갈 땅인지 모르니, 일단 '어느 곳이든'파보라는 겁니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깊게 파려면 일단 넓게 파봐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어느 영역이 '쑥 내려가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경험이 생각보다 짜릿하다는 걸 알게 되고, 그렇게 자신만의 깊이가 조금씩 생기는 거죠. 여유가 있을 때 여기저기 삽을 찔러보고, 의외로 깊이 들어가는 지점을 확인하고, 시간을 들여서 파내려 가는 거죠.
.. 본인의 직관에 의지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유 없이 마음이 가는 것,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당겨온 것들에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이를 테면 살면서 내 안에 쌓인 결핍이라든지, 본능적으로 끌리는 취향 같은 것들이요. 이런 것들이 어느 순간 '땅파기'의 무서운 동력이 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래서 남의 의견보다는 '내 생각'이 중요합니다. " (P19)
내 경우로 보자면.
내겐 '도장깨기' 같은 거였다.
하던 일을 관두며 직장을 나오면서 무엇이든 새로운 걸 하고 싶었던 욕망이 컸다.
우선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하는 출근을 걱정할 일 없이 밤늦게까지 실컷 책을 읽었으면 싶었었다.
내가 원래부터 책을 좋아했던가 생각해보면 그건 그렇지도 않다. 일을 하며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 스트레스를 혼자 어찌할 수가 없을 때 행여 도움이 될까 싶어 관련 서적을 찾아보던가 위로의 글이 실린 책들을 보며 맘을 다스리던 정도였다.
처음 읽기를 시작했을 당시 내게 책 읽기란 '읽어제끼는' 수준의 맹목적인 거였다.
한 달에 30여 권을 읽을 때도 있고. 나중엔 그 책에 무슨 말이 쓰였었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는 책들도 수두룩했다.
무수히 많은 책들을 읽어제끼던 어느 날에 던가 <메모 습관의 힘>이라는 책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 책 읽기의 속도를 줄이고.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을 필사하며. 꼭꼭 씹어 소화시키려 노력하게 됐다.
속도를 줄이고 필사를 하니.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다시 가지를 치며. 내 생각의 목소리가 웅얼거려져 글을 쓰게 됐다.
글 또한 예전의 나에게 있어 전혀 생소한 것 중에 하나였다.
한 번도 내가 글을 쓰고 싶어 지리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끊임없이 뭔가를 쓰게 될지도 몰랐었다.
글을 쓰면서 내 속에 것들을 솔직하게 쏟아낼 수 있었고. 자주 위로받고 상처가 치유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배운 것들이 많다. 평소 관심이 갔었던 분야라던가, 우연히 좋은 기회가 주어질 때면 어김없이 무조건 달려가 배우고 강의를 들었다.
어쨌든 새로운 배움은 모두 '도장깨기' 같은 것들이었다.
배우는 과정 모두 신나게 재밌었고. 3개월이 지나 금세 시들해지는 것도 있었지만.
책 읽고, 글쓰기.
목공 하기.
이 세 가지가 좀 더 깊게 들어간 땅파기였고.
좀 더 깊이 파내려 가는 동력이 되었던 건 본능적으로 끌리는 취향 같은 것들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름하여 '벽' 과제입니다.
과제는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먼저, 자신에게 어떤 '벽'이 있는지 찾아보게 합니다. 누구에게나 벽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아니, 꽤 많을 겁니다. 그중에는 오랫동안 저 너머가 궁금했던, 하지만 두드려볼 '계기'가 없던 벽도 있을 겁니다.
... 벽이라고 해서 늘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화라는 장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마블 코믹스'도 벽으로 여겨질 테죠.
같은 맥락에서 재즈도, 클래식도, 운전면허도, 종교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벽이 될 수 있습니다." (P28)
"일단 지금 이곳과는 전혀 다른 질감의 공간과, 공기와, 소리의 울림 같은 것들을 몸으로 느껴봐라. 그게 큰 재산이 될 거다."
내게도 물론 여러 벽이 있다.
운전이 그렇고, 수영이 그렇다. 목공 또한 거대한 기계들에 짓눌려 감히 도전하기가 만만치 않았었다.
사람을 칠까 봐 무서워 운전을 못하겠고.
어렸을 적 수영장에 빠져 하늘을 보며 물을 꿀꺽꿀꺽 먹었던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물자체가 무섭다.
난 강가나 바닷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가서 보고 있노라면 시퍼래서 무섭기만 하다.
목공 또한 우연한 기회에 달려가 시작하게 된 일 중 하나였는데. 굉음을 지르며 돌아가는 톱날이 첫 한 달쯤에는 계속 두렵고 스트레스였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금씩 익숙해지고 한 기계씩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기계음에 익숙해진 건, 딱 저런 거였다.
"전혀 다른 질감의 공간과, 공기와, 소리의 울림 같은 것들을 몸으로 느껴보는 것."
이쁜척하며 외모를 가꿔보지 못했던 것도 하나의 벽인 것 같다.
애초에 이뻐본 적이 없었고.
머리를 기르던지 짧게 하던지. 화장을 하나 안 하나 크게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 여겨져서 뭔가 '여성스럽게' 꾸미는 일 같은 걸 별로 해 본 기억이 없다.
한 번도 나 스스로 이쁘단 생각을 못 해본 여자의 입장이랄까.
그저 그런 것이다. 객관적으로 이쁘질 않으니. 뭐 이쁘진 않으니까. 하고 빠르게 뒷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평생을 이리 산 나에게도 참 신기한 순간이 최근에 있었는데.
오랜만에 친정에 가 아버지 방에 걸린 외가 쪽 가족사진을 보았었을 때-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짧디 짧은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하얀 셔츠에 남색 스웨터를 입고. 청바지를 다려 단정하게 입고. 시계까지 신경 써서 찼던 그때의 내 모습이.
처음으로. '귀엽게' 보였다.
아. 이런 시절이 있었지. 그래. 딱 남동생 같은 모습인데. 그때 내 모습은 대체로 그랬었다.
짧은 커트머리에 아주 단정한 캐주얼. 바지와 셔츠는 꼭 다려 입고. 마이를 입는다거나. 운동화는 항상 깨끗하고. 외출 시엔 시계까지.
지금 보니 귀여운 남동생같이 보이는데. 왜 그때 저렇게 단정하게-지금보다 단정하다- 옷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하고 다녔으면서도 왜 그리 나 스스로의 외모에 자신이 없었고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라 느꼈었을까.
그때의 내 모습을 슬쩍 어루만졌다.
"하지만 준비가 되었을 때의 만남은, '버튼'을 누릅니다.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스위치'를 켭니다. 그리고 변화가 시작되죠. 변화는 가끔 모터보트처럼 순식간에 나타나지만, 대개는 함대처럼 천천히 방향을 바꿉니다 그래서 단기간에는 그 변화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 변화의 시점은 반드시 존재하더군요.
문제는, 어떤 만남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는 변화가 끝난 다음에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별 수 있나요? 무엇이든 최대한 많이 만나는 겁니다. 어떤 만남이 나를 변화시킬지는 불명확하지만, '만남이 있어야 성장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니까요. 사람을 만나고, 영화를 만나고, 만화를 만나고, 책을 만나는 겁니다." (P58)
오늘 <공범자들>을 보고 왔다.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고 가슴이 아리기도 했다.
10년간 빼앗겼던 언론인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투쟁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잘 몰랐어서 미안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택시운전사>를 봤었는데.
<택시운전사>를 본 뒤에 <공범자들>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은 거였고.
<택시운전사>는 황석영의 <수인>을 읽고. 그 책을 다 읽은 뒤 달려가 보게 된 영화였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그 어느 부분에선가 다음에 보고 싶어 지는 분야의 책이나 영화가 정해지곤 한다.
이 작가가 맘에 들 땐, 그 작가가 추천한 다른 글이나 영화에 흥미가 일고. 그 작가가 추천한 음악을 듣는다던가 해서. 묘하게 흐름이 연결되어 지곤 한다.
8500억 원 복권에 당첨된 50대 여성의 기사를 봤었다.
너무 큰돈이 생기면 왠지 무서울 것 같은 생각이 들어-돈을 보고 협박을 당한다던지. 아이가 유괴될까 봐 걱정이 된다던지- 도무지 부럽단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내게 저 많은 돈이 생긴다면 적어도 쓸 곳이 확실하게 생긴 것이다.
기부를 한다한들 그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가 어떻게 쓰일지 걱정을 하며 찝찝해하는 건 너무 싫고.
돈이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직접 주는 것이다!
본인의 생계를 위협당하는 상황에서도 기자라는 양심의 대가로 회사에서 쫓겨나가야 했던 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취재를 하고 원하는 기사를 쓰며 뉴스를 내보낼 수 있는-뉴스타파라는 공간에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공간을 지원할 수 있다면 멋지겠다 싶다.
내가 가끔 아이의 작아진 옷을 모아 기부하는 들꽃마을에도 기부할 수 있겠다.
18살이 되어 달랑 가방 하나 들고 고아원을 나서야 하는 아이들에게. 작고 깨끗한 방을 얻을 수 있는 보증금, 기본적인 살림살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 장학금 같은 걸 지원해 줄 수 있다.
중고등 여학생들에게 좋은 생리대를 사줄 수도 있고.
한 달에 두어 번, 고기 파티를 열거나 공연을 보러 갈 수도 있다.
오래된 시설에 난방이 미흡하면 공사를 할 수도 있고. 너무 더운 날 기진맥진하지 않도록 영유아 시설에 에어컨을 설치할 수도 있겠다.
(8500억이나 생겼는데 너무 소소한 기부 아냐??? 하신다면.. 그건 제 맘입니다!!! 소소하게 시작하며 배우고. 제 스스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곳에만 '직접' 기부를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엔 슬슬 규모가 커지고 제대로 굴러가게 되지 않을까나요.. )
뭔가 알고는 있어야 돈을 제대로 쓸 수도 있다.
8500억 원의 돈이 생긴다면 내가 평소 생각했던 수준만큼의 당첨금만 남기고.(저도 먹고살아야죠..)
여기저기 정말 필요한 곳에 내가 직접 힘을 실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도 뭔가를 알고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어 있어야만 보인다는 것을.
"생각의 탄생을 위해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혼란, 우주먼지처럼 뒤죽박죽인 채로 쌓여 있는 나의 경험과 지식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인풋'일 겁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런 인풋들이 많이 쌓여 있는 사람이 좋은 생각을 꾸준히 내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남들의 아이디어와 나의 아이디어를 달라 보이게 하는 것도 바로 내 안에 쌓아둔 인풋들의 힘이겠죠. 그러니 평소에 꾸준히, 적금을 드는 심정으로 자기만의 인풋을 쌓아두는 게 중요할 겁니다. " (P63)
"저는 일에 있어서 '자존'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일을 남들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실수에는 굉장히 예민해지고 성공의 기준점은 높아질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결과의 디테일이나 완성도도 올라갈 테죠."(P79)
"끝을 향해 가면 힘이 생깁니다." (P99)
"무언가를 끝까지 밀어붙인 이들의 아름다움은 굳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까지 찾지 않아도 우리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 맑은 국물에 어떻게 이런 맛이 숨어 있지 싶은 곰탕집에 갈 때, 내비게이션의 예상 시간을 비웃으며 우리를 훨씬 빨리 목적지로 데려다주시는 택시 기사님을 만나는 순간 같을 때 말이죠.
그러니 저마다의 이유로 각자의 길 위에 오른 뒤, 일단 달리기도 마음먹었다면, 맨 끝까지 가보는 겁니다. 그 외롭고 아슬아슬한 곳에, 놀라운 힘이 숨어 있습니다." (P100)
"저는 대체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통찰'과 구조적이고도 아름다운 '문장'에 끌립니다. 천문학이나 항해술처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분야에 매력을 느끼고, 건축이나 미술처럼, 알게 되면 지금 내 주위를 구성하는 세계가 해석 가능한 텍스트로 변하는 것들에 강렬하게 끌립니다.
한 분야를 끝까지 파고든 이가 내놓은, 인간을 깊숙이 이해한 이들이 만들어낸 물건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경이로움을 느낍니다."(P171)
"생각의 힘에 대해 제가 들었던 가장 강력한 말은 붓다의 입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현재의 내 모습은, 과거 내 생각의 결과다.>
생각은 이렇게도 힘이 셉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바꿀 만큼 말이죠. 생각해보면, 오늘의 행복도, 어제의 혁명도, 내일의 변화도, 모두 생각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습니다."(P234)
천천히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었다.
공감되는 많은 글을 읽으며.
느끼고 알고 있던 생각들을 이렇게 편안하게 말해 내어주는 작가분의 생각의 내공이 부러웠다.
이제는 슬슬 느껴진다.
쉽게 씌어진 책이 훌륭하다는 점.
쉽게 말하고 있는데 맘 속에 울림이 강한 글이 고수의 글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모든 관계는 말투에서 시작된다>(김범준 지음)이라는 책이 또한 그랬었다.
누구나 알 만한 얘기들을 쉽게 풀어주고. 한 단계 더 깊게 생각하게 해 주는 책.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