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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Feb 05. 2018

<안녕, 둔촌주공아파트x가정방문>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 행복했습니다.

 지난주 독립서점에서 한 강연을 신청해서 듣고 나오는 길에 우연히 눈에 띈 책이었다.
 비닐에 꽁꽁 싸여있어 내부 내용을 상상할 수 없었는데 왠지 자꾸 눈이 가서 나오는 길에 기어이 사게 되고 말았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그리고 '가정방문'
 나는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사는 공간을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이 항상 있어 왔다.
 주위에 친구도 거의 없으니 더군다나 누군가의 공간에 들어가 볼수 있을 일은 더더욱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 저 '가정방문'이라는 문구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요즘 한창 부동산의 가격이 무지막지하게 오르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집도 무지막지하게 올라 상대적 박탈감이 있었다. 가격의 한 10% 정도가 올랐을 때.. 어어.. 이러다 평생 집을 못 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신랑에게 지금이라도 집을 사두자 설득을 해봤지만. 이 나이에 대출 끼고 집을 산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며 거품을 물고 성을 냈다. 그 뒤로 집값은 점점 가파르게 올라 30% 정도가 더 올라버렸다. 말하자면 6개월 사이 1억짜리 집이 1억 4000 정도가 되었다는 매우 슬픈 이야기.
 이제는 훨훨 날아가 버린 내 집 마련의 꿈 앞에서 허탈해질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나란히 누워있다가도 가끔 느닷없이 신랑의 멱살을 잡고 "그때 누가 말렸었지... 누가 말렸더라.." 하면 신랑은 슬슬 일어나 "어어.. 나는 내일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고.. 돈도 벌어오는 사람인데 말이야.."하면서 도망을 간다.

 어쨌거나 이래저래 아파트에 관한 관심이 좀 있기도 했고. 재개발되며 없어져가는 그 옛날의 우리가 살던 아파트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증이 일었다. 이 책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번도 가본적 없는 저 둔촌주공아파트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솔직한 인터뷰와 함께 올라온 사진들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어릴 적 살던 그 오래된 아파트에 있었던 물건들이 그대로 떠올랐다.
 
 열두 가정의 집을 취재하면서 물은 기본적인 질문은 다음의 5가지.
 1. 둔촌주공아파트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2. 여기서 어떻게 살았고, 어떤 기억이 있나요.
 3. 이 집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4. 이곳이 재건축으로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5.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이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수많은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마치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나 살던 어린 시절이 겹쳐졌다. 
 28년을 한결같이 이 아파트에서 살아온 이들도 있었고, 십몇 년을 살다 다시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벌써 십수 년 전에 재개발 얘기가 나와 그때 집을 팔고 여태까지 전세로 살아온 사람도 있고, 어릴 적 태어나 살던 곳에 다시 돌아와 신혼집을 마련한 젊은 부부도 있었다.
 복도식 아파트에 얽힌 정겨운 추억들, 그리고 여전히 옆집에 살고 있는 그 이웃들은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며 그녀의 딸에게서 그녀의 모습을 찾아 반가워하고 같이 키운다고도 했다. 네 살 딸내미는 열려있는 문을 밀고 나가 복도를 돌아다니며 이집 기웃, 저 집 기웃하며 귀여움을 받고 간식을 얻어먹고 돌아다닌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담긴 집터가 사라진다.
 그들은 하나같이 재개발이 되어 돌아올 금전적인 이득을 기뻐하기보다는 '집'이 사라지는 걸 아쉬워하고 이웃을 잃을까 걱정했다. 가도 멀리 가지는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10년 전에 집을 팔아 그 뒤로 집값이 더 오르는 걸 느끼며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6-7년 전에 너무 꼭대기에 사서 손해 본 사람들도 있으니 그 사람들도 이제야 득을 보는 거라 상관없다고도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형제자매, 고모, 삼촌까지 대가족이 같이 살다 서서히 가족들이 떠나고 이제는 혼자 남아 살고 있는 누군가는 그 모든 추억이 깃든 가구와 물건들을 껴안고 살고 있기도 하다.



 내가 30년 전쯤에 살았던 아파트도 재개발이 된다고 들었다. 내가 결혼하기 직전까지 살던 곳이다.
 작년이던가.. 지독한 길치, 방향치로 버스조차 거꾸로 타곤 하는 나는, 그 잘못된 방향의 버스를 타고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 거짓말처럼 내린 적이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 길거리에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고, 갑자기 펼쳐진 옛 동네의 모습이 마치 환상 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익숙한 길을 걸어 단지로 들어갔을 때 입구에 있던 상가는 이제 너무 낡아 올라가는 계단이 다 깨져 있었고, 가게들은 드문드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지하주차장이 없어 1층엔 꽤 많은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놀이터에는 그대로 모래가 깔려 있었다. 학교가 끝나 놀이터에 나가면 으레 같이 놀던 친구들이 펄쩍펄쩍 뛰어내렸던 그 높은 미끄럼틀이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그네와 시소, 뺑뺑이까지. 
 거대했던 아파트는 이제 구부러진 노인의 등처럼 나지막이 느껴졌고, 빨간 돌을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던 화단의 돌담도, 창문 너머 보였던 울창한 나무도, 아침부터 어르신들이 모이던 노인정도, 검은 고무줄 묶어 놀이하던 벤치도 다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밑에밑에 집에 살던 단짝친구의 강아지가 죽어 함께 묻어주었던 뒷동 화단의 모습도 그대로여서 우리가 묻어줬던 그 강아지의 무덤 언저리도 찾을 수 있었다. 깨끗한 지하수가 나온다며 식수로도 사용했던 수돗가는 이제 더 이상 식수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표지판이 놓여 있었고, 롤러스케이트 탈 때 피해 다녔던 움푹 파인 길자리, 빨간 벽돌로 뜬금없이 만들어진 계단, 느닷없이 첫 키스를 당했던 구석 놀이터의 그 가로등도 그대로였다.
 
 분리수거 따위는 없던 시절이라 9층 다용도실에서 조그마한 문(내부를 통해 1층으로 바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을 열고 온갖 쓰레기를 던져 놓으면 탕탕탕탕 소리를 내며 일층까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덕에 온갖 음식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들이 섞여 모여있던 1층 쓰레기장을 처리하는 청소차가 도착하는 날이면 온 동네에 그 지독한 냄새가 퍼졌고, 그 쓰레기를 처리하시는 아저씨들의 몸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그 험한 일을 하시던 고마운 분들을 우리는 멀리멀리 피해 다녔었다.
 우리 단지를 지나 옆 아파트 단지를 또 지나면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가 있었고, 학교가 끝나면 항상 들리던 떡볶이집이 옆 단지 상가 지하에 있었다. 알록달록한 초록색 플라스틱 그릇에 국물까지 그득히 담으면 200원, 만두 2개 추가하면 300원이었다. 어묵 국물은 당연히 공짜로 얻어먹고, 둘이서 먹을 때는 포크가 2개, 3-4명이 먹을 때는 포크를 3-4개씩 가져가도 아주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일찍 퇴근하신 아버지가 저녁 먹고 산책 가자고 나를 이끄시면 나는 항상 군말 없이 아버지 손을 잡고 나섰었다. 그 떡볶이집 옆에는 온갖 것들을 파는 문방구가 있었는데, 떡볶이 먹고 나오는 길에 항상 구경만 하며 눈도장을 찍어두었던 물건들을 아버지께 졸라 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촌스럽게 알록달록 거리는 삔도 사고, 엄마한테는 감히 말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인조가죽 핸드백을 척 하고 매고 나온 날도 있었다. 불량식품도 가끔 사주시고, 하모니카도 사주셨다. 사춘기 언니는 더 이상 아버지 손을 잡고 산책길에 따라나오지 않으니 이 산책길의 귀중한 사치품들은 모두모두 내 차지였다.

 나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폭염의 날씨에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너무나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젊었던 아버지와 어렸던 나, 친했던 친구들, 내가 놀던 장소, 변하지 않은 아파트, 잔디, 움푹 파인 길까지.
 


 꿈같았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데 그곳도 곧 저 둔촌주공아파트처럼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물론, 이미 너무 오래되어 온갖 벌레도 나올 테고, 이곳저곳 손볼 곳 많아진 낡은 집이겠지만 내 어릴 적의 기억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것 같아 서운한 맘이 든다. 그 장소가 없어진다면 내 기억 속에 있는 이 추억들을 어디 가서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다시는 시간여행 같은 건 영원히 경험해 볼 수 없을 일이다.
 


 집값 올라 불안하고 쓸쓸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나는 조용히 내 어린 시절 속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 책은 그들이 오랜 시간 살아온 소중한 '집'의 이야기였다. '가족'의 이야기였고,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480페이지의 무거웠던 책이 너무나 달게 빠르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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