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PB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진 않는다

소중한 경험

by 온수


개인자산관리를 도와준답시고 저기 깊고 좋은 방에 화사한 척 앉아있는 사람이 PB(Private Banker)이다.

투자처에 대한 정보를 주고 상품을 권유하는 입장이라 기본적인 자격증을 갖추어야 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정세를 읽히느라 회사에서도 끊임없는 교육을 시킨다.

당연히 신입직원이 그 자리에 앉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에 대한 이해, 상품에 대한 이해,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는 노련함이 갖추어져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 많은 사람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보험, 투자상품을 판매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따야 하는 자격증이 5-6개 정도 되고, 추가적으로 본인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AFPK, CFP 등을 공부하게 된다. 회사 자체적 규정에 의해 추가 자격증을 요구받기도 하고, 각종 세미나에 수시로 참석하여 고객을 설득하기 위한 정보를 끌어 모으며 지내게 된다.



처음에는 일반 창구에서 금융의 전반적인 개념을 익히며 오퍼레이팅 업무를 하고, 상냥하며 싹싹한 직원을 PB룸에 넣어준다.

조금씩 세일즈에 발을 내딛고, 경력이 쌓이면 소위 새끼 PB를 하다 승진과 더불어 정식 직함을 갖게 된다.

각 PB는 지점에 떨어지는 WM실적을 도맡게 된다. 지점의 크기마다 그 규모가 상이한데, 잘 할수록 큰 지점으로 옮기게 되니 당연히 부담도 그만큼 늘어난다.

각 지점의 실적 목표는 그 전달 말에 발표되고, 말일이 되면 그 실적에 대한 계획을 수립한다. 파이프라인이라는 것을 등록하며 다음 달 실적을 실현하기 위한 고객명, 상품 종류, 금액 등을 일일이 입력하여 상부에 보고하게 된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누구를 만나 어떤 포트폴리오로 설득할지를 작성하게 되는데 실적 목표의 150% 이상을 입력해야 한다. 실패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며 다른 점포에서 혹시 미달될 실적을 대비하여 추가 실적을 내야 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15분 정도 전 세계 시장 상황에 대한 리포트를 듣고, 주가를 확인한다.

내가 관리하는 고객들의 수익률을 체크하고, 큰 변화가 있는 부분은 메모하여 전화를 드리고 추가 가입이나 환매에 대해 얘기한다.

어제저녁 퇴근하기 전에 내가 입력한 파이프라인을 확인한다. 오늘의 만기 고객과 예약시간을 확인하고 각 서류를 준비해둔다.

현재의 시장 상황에 맞추어 왜 이 상품이 적합한지를 본인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어야 설명이 가능하다.

가끔은 그냥 무작정 들어오는 고객도 맞이해야 하고 예약을 꺼려하는 기존 고객도 많다.

4시 마감과 더불어 그 날의 실적을 다시 파이프라인에 입력하여 전날 입력한 계획을 초과 달성했는지 확인한다.

미달되었을 경우 지점장님께 보고하고, 미달된 사유와 추가 달성을 위한 계획을 본부에 보고해야 한다.

하루하루 희비가 교차하고 단 한 명의 고객을 못 만나는 일도 10명 이상의 고객을 맞이하는 날도 있다.



세미나는 많다. 업무 마감 후에 보통 종로 쪽이나 삼성동 근처 고급 호텔, 세미나장에서 열리는데 대부분이 각 운용사에서 개최하는 것이고 최고급 식사를 제공하며 각 회사의 상품들을 홍보한다. 물론, 그 상품이 현 상황에 왜 적합한지를 열렬히 설명하는데 대부분 외국 현지에서 온 외국인(!)들의 깍듯한 설명이라 통역기를 제공한다. 통역으로 들리는 설명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 상품들을 더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그중에 한 마디라도 나를 설득할 수 있을 무언가를 기다린다. 내가 설득이 되어야 고객을 설득할 수 있으므로.

본부에서 나오신 높으신 분들을 피하여 슬금슬금 뒷자리를 선호하며, 잘 나가는 PB들을 구경하며 전설 같은 경험담도 듣는다.

비슷한 업무를 하는 입장이기도 하고, 서로의 어려움을 가장 잘 이해하는 그룹이라 테이블마다 어색하진 않다.

다만, 잘 나가는 PB와 여지점장님들의 기싸움은 엄청나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PB세계는 여성들이 우세한 경우가 많고, 소위 '잘 나가는' 경지에 오르기까지 그분들이 겪은 산전수전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도 한 기(!)한다는 분들. 조심하시라. 못 당한다.



세미나는 각 지점별로 열기도 한다. 규모가 큰 지점에서는 지점 안에 회의실 겸 세미나 실이 있기 때문에 PB본인이 직접 세미나를 주최하여 시장 상황이나 세무, 상품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보험사나 운용사에 강의를 의뢰하기도 한다.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거나, 세미나 후 식사를 대접하기도 한다.

화장품 회사를 통한 마케팅도 있다. 어느 고가의 화장품 회사에서는 직원을 파견하여 지점의 회의실에서 메이크업 시현을 해주기도 한다.

고객에게 공짜로 제공될 10만 원 상당의 화장품 샘플을 일렬로 비치하고, 멋들어진 외발 의자가 높게 세팅된다. 회의실 안이 황홀한 향수 향기로 가득 채워지면 고객들이 입장한다. 무료로 시행되는 이 행사에서 화장품 회사는 고급 고객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간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이 고가의 화장품을 사기도 하고 메이크업 시현의 주인공이 된 고객은 화사하게 지점을 나서며 흡족해한다.



각 명절이나 동지,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등엔 핑계를 삼아 행사를 하거나 각 집으로 직접 방문하여 선물을 전달하기도 한다.

영하 15도의 날씨에 고객 집을 일일이 방문하다 발을 절은 경험이 있다. 무릎관절에 무리가 갔는지 2-3일간 절뚝거리며 출근을 했는데 그게 여담이라며 지점장님이 본부장께 보고를 하기도 했다. 추운 날씨보다 그 날씨에 그 일을 시키신 지점장님이 더 무서웠다.



PB라는 직업은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다.

평소라면 결코 나를 만나줄 리 없는 사회 각 계층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우선 그렇다.

돈 많은 사람은 많다. 일개 직장인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을 갖고 있는 부자들은 생각 외로 꽤 많다.

일 보고 들어가시는 사모님께 이번 달 지점에 돈 없어서 힘들다고 했더니, 그래? 알았어. 기다려봐.. 하시며 본인 입출금계좌로 60억을 쏘신 분도 계셨다. 토지보상금으로 수십억을 거머쥐게 되어 로또처럼 즐기시는 분도 계셨고, 젊은 시절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나와 자기 사업으로 큰돈을 벌은 분도 계셨다. 연예인도 가끔 볼 수 있고, 영화감독이나 엄청난 성과급을 받는 대기업 임원도 있다.

졸부도 있고, 멋진 사장님도 계시다. 캥거루족 자제분들과 그 부모님들, 상속 뒤 싸우는 형제들도 많고, 일순간에 얼굴이 바뀌는 예상외의 고객들도 많았다.


사람을 대하는 일을 좀 하다 보면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고객이 왕년에 교수셨는지, 군인이었는지, 은행원이었는지, 사업을 하신 분인지, 졸부인지, 대게 맞추는 능력이 저절로 생긴다.

하물며 그분들은 어땠겠는가. 그분들이 나를 보면 또한 속이 빤히 보였을 것이다. 이 어리숙한 은행원이 왜 내게 친절한지 뭘 요구하는지 그들도 안다.

다만 고객들도 그 많은 돈을 어찌 됐거나 은행도 두세 개 지정하여 거래를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몽땅 건물이나 땅만 구입하거나 모조리 사업자금으로만 활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중에 좀 맘에 맞는 PB를 선택해 거래를 하고, 맘 편한 지점으로 오게 되는 것이다.


모두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지만 모든 고객과 맘이 맞는 건 아니다.

PB도 사람인지라 그중 진심이 통하고, 좋은 분이 보인다. 거래의 크고 적고를 떠나 사람끼리 통하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

아무 거래가 없는 날에도 PB룸에 들어와 본인 얘기를 하시거나 고민을 털어놓는 분도 많으셨다. 손주 얘기를 하며 우시는 분도 계시고, 자신의 외로운 신세를 토로하기도 한다. 나도 내 얘기를 한다. 시댁 흉을 보거나 남편 흉도 보며 울고 웃는다. 얘기를 듣다 진심으로 울었던 적도 많다. 어차피 사람 사는 얘기인 것이다.


어느 무서운 어르신은 부부가 같이 내점 하시어 거래를 보시다가 은근히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오셨다.

상당히 보수적이시고 권위적이셔서 항상 같이 내점 하시는 사모님은 주눅이 들어 보이셨다.

신랑은 뭐하냐, 너는 무슨 학교를 나왔냐, 아이는 몇 명이냐, 애는 누가 봐주냐, 뭐 해서 너는 돈을 버냐..등등.

신랑이 장남인데 딸 하나라고 말씀드렸더니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여기서 일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아들을 낳아야 할게 아니냐는 것이다.

"회장님, 저희 신랑 집안이 뭐 그리 대단한 집은 아니여서요. 그 대를 제가 끊었습니다."

순간 허 하시며 황당해하시는 어르신 옆에 사모님이 처음으로 키득키득 웃으셨다.



매일매일 지점에 내점 하시어 여기저기 성희롱(!)을 하시는 멋쟁이 회장님도 계셨다. 한번 쓰러지신 뒤로 거동이 살짝 불편하셨는데 하루에 두세 번씩 오실 때도 있었다. 오실 때마다 옷을 갈아입고 오시며 일일이 자랑을 하셨는데 모두 명품이었다.

텔레비전으로 주식시장을 째려보시다가 오늘이다~하시면 그날이 최저치였고, 오늘이다 하시면 최고치였다. 기막힌 감을 갖고 계셨다.

처음 발령받아 온 나를 보고 못생겼다며 싫은 티를 내셨다. 어쩌랴 그분 취향이 아닌 것을. 그래도 진심으로 식사도 모시고 다니고, 농담도 받아 드리고 했더니 마음을 여셨는데 명품 자랑을 하도 하시길래 저는 구두를 좋아합니다.. 240이에요,,회장님. 말씀드렸다.

며칠 뒤 지점장님께 끌려가 혼이 났다. 회장님께서 그 구두를 사모님 몰래 사시려고 현금을 인출하려고 하셨다는 거다. 농담이었는데 심각하게 생각하셨을 회장님이 너무나 귀여우셨다.

한 번은 내 방에 거래가 오래 걸려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신 일이 있었다. 회장님이 벌겋게 화를 내시며 그 노친네는 돈이 얼마냐, 나보다 많으냐 따지시며 기분 나빠하셨는데, 그분은 내 아버지셨다.



가슴 아픈 속내를 드러내며 펑펑 우시는 고객도 계셨다.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기조차 맘이 저릴정도로 그 사연이 마음 아파서 처음 오신 고객과 펑펑 울었다. 나도 내 상처를 얘기하며 우는데 울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집안마다 각 하나씩의 아픔들이 있다는 걸 정말 절실히 느끼게 된 나날이었다.

그 사모님은 그 뒤에 가래떡을 한 박스 해오셔서 나눠주셨다.



나를 보고 거래를 하러 오는 건 아니다. 내가 속한 조직의 간판을 보고 오는 것이지 날 선택하여 거래를 하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내가 낸데.. 라며 마치 이 모든 것을 내가 이룬 거처럼 으쓱거렸던 일도 금방 그 진실과 허상을 깨닫고 겸손해지게 된다.

사람들을 만나며 경험했던 일들은 소중하다. 사람이 싫다며 지긋지긋해했지만 생각해보니 내 마음이 너무 물러 쉽게 동화되고 깨지며 지냈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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