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타만 좀 더 해라..
아예 술을 진탕 먹고 새벽에 들어올지언정 야근은 안 하는 신랑이 웬일로 좀 늦는단다.
밥은? ..
안 먹고 갈 거다..
평소보다 두 시간쯤 늦게 들어왔다. 그 시간이면 배가 무척 고팠을 텐데 싶어 평소보다 반찬도 한두 가지 더하고, 고기도 사치를 부려 비싼 불고기거리로 떡국을 끓였다.
떡국에 불고기까지 있다며 펄떡펄떡거리는 딸을 평소처럼 한없이 사랑스럽단 얼굴로 쳐다보는데, 이 남자. 얼굴이 어둡다.
아. 이 남자.
또 어디서 귀싸대기 한대 맞고. 멀리 날아가려는 자존감 붙들고 외롭게 터벅터벅 들어왔구나..
왜 모르겠는가. 나도 안다. 나도 비슷한 업종에서 일했었고, 나도 싸대기 맞으며 많이 아파봤다.
다만, '외벌이 가장'이 되어 맞는 싸대기는 얼마나 더 아프고, 두렵고, 외로울까.
직장 다닐 때, 맞고 다니는 사람 많이 봤었다. 위로 갈수록 싸대기의 강도는 또 얼마나 강해졌을지. 욕했던 모든 상사들과 그 윗 상사들의 상사들이 좀 측은하게도 느껴졌다.
가슴이 아리다. 이 남자. 오늘 시리고 아팠을까.
미안하다. 마누라 힘도 못 되어주고.
맛있는 거만 자꾸 꺼내 준다. 아이 먹이겠다고 숨겨둔 아이스크림도 꺼내 주고, 좋아하는 커피도 타 주고, 과일도 내준다.
쫓겨나 혼자 자는 아이방, 아이 침대에 전기장판 불도 올려 둔다.
와이셔츠 다리기만큼은 신랑 몫이었는데 오늘은 특별히 내가 3장 다린다.
다음 주 설에 시댁 갔다 와서 투덜거리지 말아야지..
미뤄두었던 세탁물도 탈탈 챙겨서 세탁소에 맡겨둔다. 돈 아까워 집에서 빨던 신랑 목도리도 빳빳하고 단정하게 입히려고 같이 껴둔다.
직장에 다니며 느끼는 일에 대한,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가 뭔지 나도 너무 잘 안다.
저 새끼 머리를 벽에 박아버리고, 나도 같이 죽어주마 이성을 잃고 덤빈 적도 있었다.
원형탈모증에 하혈까지 했었는데 그런데도 버텼으면 나 같은 약골은 피토하며 죽었을지 모르겠다.
나를 가장이라며 굳건하길 바라던 신랑은 괜찮다 괜찮다 외벌이 가장이 되었고.
요즘은 본인의 정년퇴직까지의 날짜를 앱으로 세고 있다.
"거까지 다니는 게 너무 끔찍해서 관둘라고 보는 거야?"
".. 뭔 소리야.. 이 날짜까지 안 짤리고 버틸 수 있을지 세고 있는 거지..."
맞벌이를 하며 살림을 도와주지 않던 신랑이 두고두고 야속해서, 관둔 뒤인데도 이런 말도 했었다.
"내가 직장을 관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이 가사를 너무 도와주지 않아서였어."
고로 앞으로 혼자 벌어야 하는 입장이 된 걸 축하해."
그 뒤에 한 달 알바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정.성.껏. 가사를 도와주는지..
이 식끼. 이제야 말끼 알아듣고 돈 벌어 온다니 좋아하는구나.....
한편 씁쓸하면서도 이해는 됐다.
얼마나 외롭고 무섭겠는가.
나보고 다시 그 피똥 싸던 현장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차라리 지금보다 세배쯤 신랑에게 잘 해줄 자신이 있다.
극단적인 말실수와 행동으로 날 괴롭히고 상처를 준다 해도 기꺼이 감수하며, 니가 스트레스에 쩔어 내게 화풀이를 하는구나 너그러이 받아 줄 의향도 있다.
가장들 불쌍하고 힘들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든 생계형 직장인들. 너무나 '파이팅'..
책상마다 찾아가 백허그를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