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신랑 눈치 봐요..
같이 퇴직한 이들을 만나는 모임이 가장 마음이 편했다.
같이 퇴직을 한 동기들이나 상사, 후배 직원들을 만나면 느끼며 사는 감정들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뭐라도 다시 해야 하지 않겠냐며 부지런히 나름의 경력을 쌓고 있었다.
여기저기 찔러보며 관심 있는 분야의 자격증을 따기도 하고, 시간선택제 금융권에 다시 입사한 친구도 있었다. 전직지원회사에 시간제로 계약서를 쓰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문화센터 강사가 되셨다는 분도 있었다.
다시 하던 일로 가거나, 조금 다르지만 하던 경력에 맞추어 재취업하신 지점장님들 소식도 가끔 들렸다. 대개는 받던 연봉이 많이 줄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재취업하신 분들은 축하를 받았다.
운 좋게 구청에서 하는 교육을 듣게 된 어느 여성분은 거기 강사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며 얘기했다.
어디 다니신 분은 어디로도 가고, 저기 다니신 분은 저런 곳도 가는데 은행 나오신 분은 정말 할 게 없어요.. 아무것도 못해요..
그 자리에 은행 퇴직자가 있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셨나 보다. 사실 달리 반박할 수도 없다. 사실인걸 이제는 인정하게 됐으니까.
그 교육은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자신들의 소개를 듣다 보니 하던 일이 참 다양하고 화려했다고 한다. 내로라하는 회사에서 꽤 오랜 시간 일하다 나오신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분들 역시 여기저기 알아보고, 공부하며 지낸다고 했단다.
그중 한 분은 이런 얘기도 하셨다는데 슬쩍 뜨끔했다.
'회사를 나오고 보니 내가 회사 다닐 때 참 갑질을 많이 했었더라.. 창피하고 미안하다.. 그땐 그걸 몰랐다..'
다시 일을 찾고자 하는 경력단절 여성들의 경력은 대부분 화려하다!
대단한 학벌, 유학파, 외국계 회사, 대기업 출신, 게다가 전문직까지.
그들의 경력단절 이유는 대부분 비슷하다.
맡길 곳 없는 갓난아이,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방목되는 초등생, 자폐 증상을 보이는 딸, 학교에 적응 못하는 아들, 자식의 사춘기. 아이의 반복적인 가출... 육아인 것이다.
동시에 작용했던 다른 이유들도 얹어졌겠지만, 아이에 대한 비중이 가장 크고 그건 공통되는 엄마들의 고민이었다.
직장을 다니다 관둔 여자들의 또 하나 공통점은 배우자의 외벌이가 신경 쓰인다는 거다.
처음에야 받아둔 퇴직금으로 잘난 척도 좀 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지 않는 생활비와 들어오지 않는 월급이 스스로를 위축시켰다.
이게 원래부터 전업주부였던 분들의 대부분 반응은 "자기 너무 착하다~ 그게 뭘 신경 쓰여!'' 하시는데.
나도 처음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던 부분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책을 살 때도 그렇다.
예전엔 주말마다 마트 가서 장보고, 오는 길에 서점 가서 5-6권 정도의 책을 사 오며 그저 뿌듯하고 좋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거다.
내가 뭐 명품가방은 안 사잖아.. 대신 일 년에 가방 하나씩 산다고 생각하고, 책을 실컷 사면 안 되겠나.. 하고 가계부와 대화를 한다거나.
마누라가 말이야.. 우울하다며 비실거리는 거보다 책 실컷 사서 좋아라 하는 게 당신에게도 더 나은 거지? 그렇지? 내가 우울증 상담이라도 받아봐라. 그게 한 번에 십만 원씩 한다는데 내가 책 사보며 건강하게 단순하게 즐겁게 사는 게 당신에게도 더 좋은 거 아냐? 그지?.. 하며 신랑에게 맘 속으로 물어본다거나.
나는 그 퇴직금도 많이 준다는 금융권 명퇴자인데, 불과 일 년이 좀 넘은 지금 생활비 주는 신랑 눈치를 보는 마누라가 되었다.
신랑은 그런 적 없다는데.
괜찮겠어, 그게..? 싶고.
신랑은 또 나 행복하게 하고 싶은 거 하라는데.
나 혼자 그래도 되나...? 싶고.
나는 혼자 놀러 다니면서도 참 꾸준히 돈은 쓰게 되고.
가끔 하던 알바도 이젠 관심조차 가질 않는데.
이래도 되려나.. 불안해하며 즐기는 여유들이 한없이 고마운 사치였다가. 불안감이었다가. 하루는 금방금방 가고 있다.
퇴직금 전셋값에 다 때려 넣고. 내 돈 다 없어진 것 같아 아쉽다.
따로 좀 챙겨둔 목돈도 외벌이 모자란 생활비로, 적금 자동이체로 따박따박 사라져 가고 있다.
아이는 한참 더 커야 하고.
신랑은 벌써 저렇게 늙었는데.
마흔 됐다고 방황하던 오춘기도 작년으로 끝내버리고.
나이 들어서 하기에 더 좋을 일들이 무언가 열심히 생각 중이다.
그 일이 나를 지탱해주고 활기를 띠게 하는 거면 좋겠다. 돈 된다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