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소중합니다.
5학년이 되는 딸아이가 영어문법을 처음 배우게 됐다. 두 번째 수업을 가기 전날 밤, 침대에 누워 울고 있다.
왜 울어.
"가기 싫어.. 숙제도 하기 싫고... 싫다고."
우선 자자.. 내일 다시 생각하자. 아까 수학 숙제하느라고 머리를 써서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자자.
아침이 되니 일어나자마자 운다.
"가기 싫어.."
예민하고 내성적인 딸. 날 닮아 맘이 약하다.
다른 아이들 다 아는 걸 혼자 못 쫓아가니 창피했나 보다 싶어 맘이 짠해진다.
그럼 관두자. 나중에 아주아주 쉽게 가르쳐주는 과외선생님한테 배우지 뭐.
출근하던 신랑이 날 몰래 불러다 한마디 한다.
애 가기 싫다고 금방 가지 말라면 어떡해? 살살 달래서 보내야지..
다른 애들 하는 거만큼은 해야지. 언제까지 그럴래..
그런가.. 다시 애를 달랜다.
원래 처음이 어려워. 엄마는 아직도 문법이 어렵더라. 생각도 잘 안 나고. 그게 원래 단어 외는 것보다 어려운 거야.
근데.. 저기.. 너희 반 애들 대치동 학원 가는 애들도 많고 대형학원도 많이 간대...
엄마가 극성 엄마는 아니쟎어. 엄마가 저기 대치동 그런데 가자는 말 안 해. 대형학원도 너 싫음 말고.
근데.. 중간은 해야쟎어. 엄마의 안일한 생각 때문에 네 능력의 30%만 발휘되고 있는 건 아닐까 겁이 나.
엄마가 너 일등 하라고 안하쟎어.. 엄마는 원래 2등이나 3등이 좋아.. 근데 엄마 때문에 네가 꼴찌 할까 봐 그건 좀 그래..
서럽게 울던 아이는 내가 방을 나간 후 한참 뒤에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한다.
시간에 맞춰 옷을 입고 방긋 웃으며 엄마 나 갔다 올게~..
나는 맘이 좋질 않아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아이가 집을 나서고 나서야 몸을 일으켜 허공을 본다.
뭐가 정답인 거냐. 까짓 문법. 거 좀 이따 해도 되지 않나... 내가 너무 욕심을 안 부리는 건가. 아이를 달래서 보낸 게 잘한 일인 건가...
내 아이는 엄마 없는 동안 저 여린 맘으로 어찌 적응하며 세상을 살았던 걸까.
첫 어린이집은 친정엄마가 한 달을 쫒아다니셨었다.
아예 교실에 들어가 수업도 같이 듣고, 간식도 같이 먹고 하셨다는데 적응을 못했다.
두 번째 어린이집은 애 봐주시던 아주머니의 단호한 행동으로 어찌어찌 적응해 들어갔었다.
1년 뒤 어린이집에서 보내준 단체사진을 보고 왈칵 눈물이 났다.
알록달록 이쁘게도 입혀 보낸 아이들 중에 우리 아이가 가장 어리숙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왜 그것도 못 챙겼을까.
양말부터 짱짱한 걸로 바꾸고, 알록달록 옷도 사 오고 머리도 단정히 다듬어주었다.
어쩌다 휴가날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러 나가면 친구 엄마들이 인사를 하며 얘기하곤 했다.
"아이고 오늘은 신이 났네요. 맨날 아주머니 뒤에 숨어있거나 조용히 있었는데.. "
기죽어 있었구나. 아줌마 뒤에 숨긴 왜 숨었어. 인사를 해야지..
초등학교는 좀 컸으니까 괜찮아 질라나...
엄마.. 오늘 준비물이 이건데..
아이고 이제야 얘기하면 어떡해.. 엄마 저녁에 퇴근하면 몇 시가 될지 모르는데..
식물을 어디 가서 사.. 그건 또 뭐야.. 학부모회의 못가.. 공개수업.. 미리 말해줘야지..
엄마.. 영어 숙제 모르겠어..
오늘은 아빠가 일찍 가실 거야.. 아빠한테 물어보자.. 응.
아빠는 술 먹고 늦는다는데..
그럼 아주머니께 좀 여쭤봐 봐..
아줌마는 영어를 모르신대.. 중국에선 영어 안 가르쳐줬대..
그냥 다 구멍인 채로 지나가버렸다.
몇 번의 공개수업 날엔 기죽어 앉아 있었을 테고, 삼삼오오 아이들끼리 방방 놀이방에 갈 때는 끼지를 못했다.
나는 스트레스로 꽉 차 내 숨쉬기가 버거웠다.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회사에서 온 몸으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그리 대범하지도 못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기도 싫어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오로지 내가 맞추어야 하는 실적의 숫자가 꿈에서조차 나를 괴롭혔다.
왜 그렇게까지 그랬을까. 그게 뭐라고. 그게 중요한 게 아녔잖아..
그 당시 모시던 여지점장님의 딸이 고3이었다.
떡이라도 챙겨드리자 싶어 수능날이 언제냐고 여쭤봤더니 12월 아닌가? 하신다.
예?
찾아보니 11월이다. 날짜를 조용히 알려드리고 나오는데 저 모습이 내 모습인 것 같았다.
아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나도 저렇게 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들어 퇴사를 결심했었다.
퇴직을 하고 온종일 나의 시간을 아이에게 쏟아붓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동안 내 아이는 외로웠을까. 엄마를 원망했을까.
지금도 하루에 열 번쯤 안아달라고 온다. 그것도 횟수가 줄어 열 번이고 처음에는 수시로 내게 안겨 있었다.
처음으로 대형학원에 가서 테스트를 받고 상담 선생님께 휘둘리고 온 날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야.. 무섭구나.. 이거.. 요즘애들이 장난이 아니구나.. 저 선생님도 장난이 아니시네.. 대박.. 나도 한상담 했던 여자인데 이렇게 정신없이 당하고 나올 줄이야..
연신 나도 모르게 네네 거리며 변명을 하고 있었다.
아이 잘못이 아니라 제 잘못이에요. 제가 직장생활을 해서 여태 제대로 된 학원에 못 다녀봐서 그래요. 네네 테스트도 처음이에요... 네네..
그렇다면 대기반이라도 하실래요 말씀에 고맙습니다고맙습니다 덥석 등록을 시켰다 보름 만에 관두고 말았다. 그 영어 숙제를 나도 풀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동네 상가에 있는 조그마한 학원에 아이를 등록시키고 차근차근 가자. 까짓 거 별거 아냐. 너는 엄마를 닮아서 똑똑해. 여기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면 된다. 뭐 별거 없어. 걱정 마. 그래. 친구 만나 놀아야지. 실컷 놀아. 이제 우리도 애들이랑 같이 방방 놀이방 가자. 엄마가 시간이 많으니까 엄마모임에 끼어 볼게.
1년 반의 시간 동안 아이와 나는 우리의 생활에 적응이 되었다.
엄마가 모든 스케줄을 자신을 위해 맞춘다는 것에 만족해했다. 어쩌다 한 달 일을 나갈 때는 레고를 사준다는 조건을 슬쩍 내걸었다. 그러면 한 달 정도는 그럭저럭 버텨주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한 달이니까 가능.
내 모든 것을 걸어 일을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직장을 나오고 처음으로 아무 소속 없이, 내가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가 참 오래 걸렸다. 오십 초 반에 퇴직을 하시고 두 번째 직장에서 일을 하시는 막내 삼촌께 이 얘기를 했을 땐, "어라. 빨리 알았는데? 일 년 반이면 양호하다. 야. "
아이의 방학이면 정말 아무 대책이 없는데도 뭔가 일을 찾아 계속 알아보던 행동을 멈췄다.
아직 아이를 놓을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아직 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일을 시작할 때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아이는 아직 나를 많이 필요로 한다.
요즘처럼 방학이면 아이의 들쑥날쑥한 방과 후 수업과 학원 스케줄로 나 역시 외출조차 못하는 날이 많다. 아침 먹고 방과 후, 다녀와서 점심, 좀 쉬며 놀다가 학원 숙제하고 간식, 학원 갔다가 돌아오면 저녁, 목욕, 취침까지 오로지 내 몫이다. 중간에 엄마랑 좀 놀기도 해야 하고, 숙제할 때는 침대에 누워 같이 책을 봐야 하고, 모르는 게 나오면 바로바로 설명도 해줘야 한다.
시간이 많이 비는 날엔 같이 삼청동에 가서 수제비도 먹고, 도서관에도 가며 미장원에 나란히 앉아 머리도 한다. 맛난 디저트 가게를 찾아가서 케이크도 먹고, 나는 커피, 아이는 주스를 들고 거리를 걷는다.
퇴근한 신랑이 묻는다.
" 학원은 보냈어? "
응.. 어제도 울고 오늘 아침에도 울었는데 잘 달래서 보냈어..
맘이 좀 그렇더라.. 애는 괜찮아졌다고 하는데. 뭐가 정답인지 모르겠어..
"애 치과는 갔어? 이빨 이중으로 올라오던데.. 빨리 가보라니까.."
.... 애가 어릴 적에 신경치료받고 치과 얘기만 나와도 우는데.. 좀 있다가 달래서 가야지..
오늘 디게 서러운 날이었는데 어떻게 치과까지 강행군을 시키냐..
딸내미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는 주제에 나 집에 있다고 온갖 책임을 미루며 날 추궁한다.
애랑 3-4시간은 놀아도 종일 지내게 두면 빨리 돌아오라고 난리를 치는 주제에.
오늘 애 달래 보내 놓고 맘 안 좋았다니까 눈치도 드럽게 읎네. 진짜.
"야! 나 니 딸 못 키우겠다!
한 번씩 성질부리면 얼마나 못되게 구는지 알아..?
24시간 붙어서 밥 챙겨주며 있어봤어?"
" O.O...... "
"한 번씩 못 키우겠다 싶어.. 적성에 안 맞네.. 애 엄마한테 보내.. (아. 제 친딸 맞습니다만.)"
"애 친엄마가... 성질이 지랄 맞아.. 그냥 니가 키워.. "
아이와 함께 지내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감사하다.
날씨 따라 세심하게 옷 골라 입히고, 중간중간 배고프지 않게 간식 챙기며, 비 오는 날 우산 챙겨 달려갈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직은 아이에게 집중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