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꾸 제 삶 여기저기 나타나고 계시네요..ㅎㅎ
내 언니는 일러스트 작가다.
언니네 집에 놀러 가면 언니가 작업하는 방에 언니가 직접 작업해서 내놓은 많은 책들이 있다.
글을 쓰지는 않고 그림만 그리니 글쓴이와 그림 그린이가 나뉘는 책들이다.
그날도 책장을 기웃거리며 책들을 훑어보다 깜짝 놀라 물었다.
"이 작가분과 같이 작업했어? 고정욱 교수님? 직접 만나본 거야..?"
언니는 아니라고. 글을 받아 그림 작업을 했기 때문에 글 쓰신 분과 만난 적은 없다고 했다.
고정욱 교수님은 내가 대학 1학년 때 처음 들어간 교양수업 교수님이셨다.
재수 끝에 내가 정말 원하던 학교에 떨어지고. 차선책으로 붙은 곳에 가 앉아있긴 했지만.
나는 이미 3수를 하고자 마음먹고 있었고. 그 학교에는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3수까지 하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기가 죄송해서 학교에 다니는 척을 하며 돈을 벌 요량이었다.
6개월 일해서 돈 벌어다가 6개월 학원에 다닐 생각으로.
나는 이미 학교 앞에 있는 식당에 면접(?)을 보고 수업이 끝나면 6시부터 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필 식당이냐면.. 맘 같아선 멋진 커피전문점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으나.. 그 당시나 지금이나-지금은 좀 덜한 것 같지만-커피전문점에서 일하는 이들은 쭉쭉빵빵한 미모의 남녀 학생이었기 때문에 알아서 포기하고 식당에 갔다.. 는 아주 슬픈 얘기)
첫 수업 들뜬 1학년 학생들은 웅성웅성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강의실 앞쪽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작은 체격의 어떤 이를 등에 업고 들어왔다.
웅성거리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고. 업혀 들어온 그 작은 체격의 남자분은 앞에 놓여 있던 학생용 책상(의자가 붙어있는)에 앉혀졌다. 목발을 옆에 정리하고 몸 매무시를 다시 하시곤 조교에게 눈짓을 보내 밖으로 내보냈다.
(나중에 찾아보니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1급 지체 장애인이 되었다고 했다.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셨다.)
그분이 고정욱 교수님이셨다.
그분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힘찼다.
새내기 100명의 시선을 한 번에 압도할만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가물거리는 기억으로 더듬자면. 첫 수업은 그 많은 학생들의 3분 스피치였다.
각자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이제까지의 인생을 3분으로 압축해서 발표해 보도록!
다음 강의시간 숙제로는 리포트를 써오라 하셨는데.
주제가 '내가 이 학교를 꼭 다녀야 하는 이유'였다.
아니 뭔 주제가.. 나는 이 학교를 계속 다닐 생각도 없었고.
다소 센 그분의 말투와 생각, 강의방식이 좀 거슬리기도 해서 반발심이 일었다.
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내 얘기를 했다.
나는 사실 이 학교를 원했던 게 아니고.
지금 돈을 벌어서.
다시 입시를 치를 생각이며.
것 때문에 머리도 이렇게 짧게 잘랐소.
나는 어떻게든 여기를 다니는 동안에는 단물만 쏙 빼먹고 내가 원하는 길을 갈 것이오....라고.
어차피 점수야 상관없지 않은가.
오호.
나는 100명 중에 딱 두 명 주신 A+를 받았다.
노트에 휘갈겨 내놓은 리포트엔 여기저기 빨간 밑줄이 힘차게 쳐져 있었고.
두 번째 리포트는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써냈다.
사실 그 당시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할 책이었는데 마침 그즈음에 그걸 읽었던 모양이다.
나는 또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분의 수업은 항상 열정적이었다.
그 당시에 유일하게 그렇게 느꼈었고. 점점 수업에 흥미가 일었지만.
알바로 돈을 버느라 수업에 점점 빠지게 되면서 그 뒤 강의는 어떻게 진행됐는지 모른다.
지난 명절에 조카를 데리고 서점에 갔었다.
중학생 여자 조카아이는 나와 만화책 좋아하는 코드가 비슷해서 갈 때마다 대여섯 권의 만화책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연휴 중 하루는 같이 서점에 가서 책을 보곤 한다.
그날도 책을 고르라고 하고 기다리는데 골라잡은 책이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였다.
겉표지에 '무슨무슨 청소년들의 성 이야기'라고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거 청소년을 위한 책 맞아?"
조카는 이 책이 아이들 사이에 무척 인기 있는 책이라고 했다.
맞나.. 하면서 살펴보는데
'고정욱 지음'
어?
아. 그럴 리가 없는데. 이런 책을 지으실 분이 아닌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수백 권 써오셨고. 그중엔 베스트셀러가 된 책도 여러 권 있었다.
며칠 전 브런치에 글을 읽고 훌륭한 선생님에 대한 댓글을 달다가.
문득. 왜 나는 기억에 남는 좋은 선생님이 없나.. 하고 새삼 기억을 더듬었었다.
그때도 문득 떠오른 선생님이 고정욱 교수님.
아. 그분은 참 좋으셨지.
정말 열성적으로 강의를 하시는 대단하신 분이었어.
아. 나에게도 기억에 남을만한 좋은 스승 한분쯤은 있구나..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오늘은 <일독 일행 독서법>을 단숨에 읽었다.
브런치에 '초인 용샘'으로 좋은 글을 많이 올리시는 작가님의 책이다.
본인의 경험과 책에 대한 좋은 생각이 많이 들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건,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책을 낸 작가들을 멘토로 삼아 1년간 100명 이상의 만남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좋은 책을 읽고 메모하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 것까지는 해봤지만.
그 작가를 직접 만나볼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책 뒤에 있는 작가의 이메일 주소로 무작정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도 놀랍게도 70% 이상의 작가들이 답변을 해줬고 수많은 만남으로 이어졌다는 것.
책 뒷부분에 3명의 멘토와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고정욱 작가였다!!!
아. 나 요즘 이 분과 자꾸 여기저기서 마주치네.. 싶어 신기했다.
것도 내가 이 분께 강의를 들은 것은 20년 전의 일인데. 딱 최근에 여기저기서 이 분을 마주친다.
뭘까.
왜 갑자기 자꾸 이 분 생각이 날까.
인터넷에 찾아보니 그동안 수백 권의 책을 낸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강연 작가 1순위라고도 했다.
사진을 보니 옛 모습 그대로 셔서 피식 웃음이 났다.
고정욱 교수님!
당연히 저를 전혀 기억 못 하시겠지만.
저는 그 전에는 한 번도 글로 칭찬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네요.
그 이후에 제대로 글을 쓸 기회 같은 건 아예 없었지만.
제가 끝내 3수를 하겠다며 교수님 수업을 많이 빼먹었던 게 이제 와서 후회가 되네요.
그 이후 강의는 어떤 내용이었을지. 이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됐습니다.
그래도 그때 좋은 점수를 주신 거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강의는 정말 최고였는데.
아참. 그때 그 리포트 때문이었는지 저는 끝내 3수를 못하고 그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
20년이 지나 저는 요즘 글을 씁니다.
일기 같은 사사로운 글이지만. 아마도 교수님의 리포트 이후 처음 써보는 글들입니다.
교수님께선 좋은 책 많이 쓰시고 여러 좋은 일을 하시며 여전히 멋지게 살고 계시네요.
요즘 우연찮게 교수님께서 제 삶 여기저기 자꾸 출현하고 계세요. ㅎㅎ
언제 한번 강의하시는 곳에 찾아가 뵙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스무 살 그때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 두 배의 시간이 지나있네요.
아. 그때 자랑하시던 딸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겠군요!
앞으로도 아이들을 위한 좋은 책 많이 써주시고. 좋은 강의 많이 해주시길 빕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