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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Apr 07. 2016

어쩌면 가족이 제일 모른다

신랑도 가끔 낯설어요.


 정말 몰랐다.

 결혼한 지 15년째인데 나는 신랑이 좋아하는 줄 알았다.

 워낙에 표현이 없고 무뚝뚝한 사람이라 내가 무언가 음식을 정성껏 해주어도 묵묵히 먹어주면 맛있다는 표현이고, 더 달라면 매우 맛있다는 표현이었다.

 스킨십도 그랬다.

 나는 스킨십을 좋아해서 신랑이 옆에 있으면 열심히 스킨십을 했었는데.

 (상상하지 마라. 뭘 상상해도 그 이하다. 15년 된 부부는 화끈한 뭐 그런 거 없다. )

 처음에는 가만히 있다가 좀 지나면 으응~하고 몸을 비튼다. 그럼 그만하라는 소리로 알아듣고 멈추곤 했었는데.

 (그래도 상상하는 당신! 주로 머리 쓰다듬기나 팔. 배. 뭐 이런 비성감대 머리 몸통 쪽이다.)

 얼마 전에 그러는 거다.

 으응~ 하며 인상을 쓰더니만...

 "아퍼... 살이 쓸려서 아프다고..."

 

 O.O  

 나는 깜짝 놀랐다. 아프다고? 어디가?

 신랑은 피부가 예민한 편이라 조금만 긁어도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르거나, 두드러기 같은 게 자주 올라오긴 했었지만.

 내 스킨십이 아픈지는 몰랐다!

 

 그렇다면 15년 동안 쭉 아팠다는 말인가.

 왜 진작 아프다고 얘기를 안했냐고 물으니.

 계속 표현을 했었단다. 나한테.

 "으응~"이라고.

 아. 쓸려서 아프다고 말을 하지, 이 사람아.

 나는 15년 동안 그게 앙탈인 줄 알았구먼.

 

 

 부부지간에 이걸 15년 동안이나 반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니 살짝 쇼킹.

 아무리 부부여도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신랑이 첫 번째 직장을 옮겼을 때 나는 만삭이었다.

 세 번의 면접 후 이미 이직이 결정된 상태에서 내게 통보하듯 말했었다.

 나는 3일 뒤 아이를 낳았고, 퇴사 상태였던 신랑은 같이 보름 정도를 집에서 쉬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 외국으로 주재원을 나가게 됐을 때도 통보였다.

 이미 결정이 다 된 상태에서 슬그머니 말을 꺼냈었는데 그때는 정말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했는지. 어떤 연유로 나가게 됐는지. 회사 사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나가는 게 좋은 건지. 가족은 같이 갈 수 없는지. 일체의 설명이 생략이다.

 짐 싸서 나가는 그 날까지 나는 화가 수그러들지 않았고.

 

 

 신랑이 떠난 뒤 어린 딸을 혼자 돌보아야 했던 그 시간이 너무 힘들어 원망하는 마음이 더 커지기도 했다.

 직장을 나가는 평일에는 아이 봐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시긴 했지만 주말마다 보채며 엄마와 48시간 바싹 붙어 놀기를 원하는 아이가 솔직히 힘들었다. 나는 평일 내내 일찍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고, 주말 중 하루는 잠을 자서 체력을 보충해야 했다.

 아이의 유치원에서 하는 행사도 엄마 혼자 가야 했고, 주말에 외출도 아이와 둘이서만. 소풍도 둘이서만. 외식도 쇼핑도 마트도 다 그랬다.

 셋씩 넷씩 가족끼리 다니는 사람들 중에 유독 우리 모녀는 외로워 보였다.

 나는 강제로 싱글맘이 된 채 알 수 없는 서러움을 느꼈고.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고자 노력했지만 때론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는 날이 있었다.

 

 

 중간에 전세 만료가 되어 혼자 이사를 해야 할 상황까지 닥쳤는데, 다행히 집주인께 양해를 구해 오른 전셋값의 반만 주고 눌러앉을 수 있었다.

 (사실. 이사라면 하도 다녀서 혼자서도 무리 없이 이사를 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사를 할 때는 내가 거의 날을 잡고 집을 보러 다니고 이삿짐센터며 관리실에 연락을 하고 예약을 한다. 집계약도 내가 하고 돈 관리도 내가 하고 부동산 복비도 내가 흥정한다. 그러니까.. 내가 면허만 따면. 나는 혼자 살 수 있다고!!!!)

 

 

 두세 달에 한 번씩 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탔지만 한창 아빠를 좋아하며 애교를 부려대는 딸아이에게 그 짧은 만남의 상황 자체가 가혹하기도 했다.

 맨 처음 비행기를 타고 신랑에게 도착했던 날, 그렇게 활짝 웃으며 팔딱거리는 딸아이를 처음 봤다. 2박 3일 짧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공항에선 그 어린 게 아빠와 헤어진다며 참았던 울음을 왈칵 터뜨려 신랑과 나는 둘 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는 아이를 등에 업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정말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랑도 내 등에서 서럽게 우는 딸아이를 보고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아이도 아이지만 나도 외로웠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퇴근 후 이 세상에 오직 한 명, 오롯이 내 편인 사람이 부재중이라는 현실이 날 답답하고 외롭게 했다. 그날 있었던 서러운 사건들을 수다 떨며 풀어버릴 상대가 없었다.

 힘든 날에는 또 원망이. 원망 뒤엔 혼자 눈물이 났다.

 


 

 며칠 전에 신랑이 술을 잔뜩 먹고 들어와 얘기를 한다. (네네.. 주로 술이죠..)

 몇 년 전만 하더라고 업체 사람들을 만나 술자리에 가서 분위기가 좀 얼큰해지면(취하면) 으레 "학교 어디 나오셨어요? "라고 물었단다.

 (아니, 왜. 그런 걸 묻지. 완전 실례 아닌가. 도대체. O.O. 이해할 수가 없다. 여자들끼리는 술 먹어도 그런 거 안 묻는다. 절대.)

 상대편에 나오는 분들이 대기업에 높은 분들이거나 능력 있는 젊은 분들이라 대부분은 SKY졸업생들이고. 당연히 상대도 그런 줄 알고 친분도모를 위해 내뱉는 거라는 거다.

 근데 그 당연해야 할 SKY가 아니다. 우리 신랑은.

 그래서 저는 어딥니다 하면 다음에 할 말들이 없어지며 뻘쭘하여졌었다나.

 

 

 근데 요즘은 "어디에서 공부하셨어요?" 란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 어느 대학에서 유학을 하셨어요..라는 질문이란다.

 나 참. 미쿡.에는 가 본 적도 없는데. 대부분 미국 유학파시란다. 요즘 회사 자금부쪽은 해외 유학파만 뽑으시나.

 신랑이 미국에는 가 본 적도 없다고 하면 상대방이 오히려 놀라워한다니.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그 상황에 그나마.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 몇 년 동안 근무를 했었다고 얘기를 덧붙이면 상대가 매우 매우 반가워하며 다음 얘기가 술술 풀리더라는 거다.

 그리고 그제야 좀 맘이 풀린다는 얘기겠지. 저 불쌍한 토종은.

 


 

 아. 그랬구나.

 그게 참 아무것도 아니면서 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어서 맘이 상하고 그랬었구나....

 본인 이력서에 한 줄 쓸 거리 만들러 해외근무 간다더니.

 그게 당신한테는 스스로 어깨 피며 주눅 들지 않으려고 나이 들어 힘들게 간 유학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그 사실을 알고 하염없이 이 남자가 측은하고 가여워서 적어도 이젠 과거 일을 들추며 원망의 얘기는 좀 하지 말자 싶었다.

 내게 채 다 말하지 못한 이유를 내가 물으면 안 되는 거였구나 이제야 알겠다.

 


 

 같이 살아도 잘 모른다. 가족이 제일 모를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

 신랑이 직장에서 어떤 모습일지 나는 잘 모른다.

 내가 그와 같이 한 곳에서 일한 것은 16년 전의 일이다.

 지금 신랑은 40중반의 남자이고. 나는 그로부터 15년 동안 같이 살아왔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갈 때가 많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에 안색이 싹 바뀌어서 나는 영문을 모른 채 잊어버렸다가.

 며칠 뒤 술 먹고(네네. 술이죠) 들어와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느냐"며 울분을 토해낼 땐 이건 또 뭐야 하며 열심히 대가리를 굴려야 한다.

 나는 분명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저 모지란 인간은 내가 하는 말을 칼로 받아 자기 스스로 상처를 낸 채 내게 들이민다.

 이 봐라. 이 봐라. 니가 나한테 이랬다며. (내가 언제.그랬더라.대가리대가리.. 대굴대굴..)

 



 또 생각해보자면.

 내 자식도 사실 점점 모르게 될 것이다.

 내 새끼 이쁘다고 엉덩이 팡팡거리며 쪽쪽 빨아대도 학교에서는 어엿한 5학년 숙녀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테고.

 가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내가 모르는 언어로 툭 내뱉을 땐 나는 갑자기 딸이 낯설어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도 한다.

 선생님께 혼난 얘기도. 자존심 상했던 상황도. 집에 와선 일절 얘기하지 않는다.

 다른 집 딸들은 집에 와서 조잘조잘 말도 잘 한다는데 우리 딸은 일체 얘기가 잘 없다.

 내가 알아서 잘 살펴볼 도리밖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슬쩍 친정부모님이 생각나 전화를 걸어본다.

 평소 무심하기로 유명한 두 분이시니 내 무심함이야 당연히 이해를 하시겠지.. 하면서 전화를 뜸하게 드렸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가 그러신다.

 

 "이야~~~~~~~~ 너 오랜만이다! 응??!! "

 

 아. 서운하셨나. 맨날 다른 자식만 찾으시길래 내가 좀 삐져있었는데.  나이 드시니 변하시는구나 싶다. 요즘. 자꾸.

 좋아. 너그러운 둘째 딸이 꾸준히 자주 전화를 드리리다.

 너무 기대 하시진 말고.

 


 

 근데 하긴.

 남들이 나를 뭐 얼마나 잘 알까 싶다.

 나는 누군가에게 확 정을 주는 스타일도 아니고.

 너무 훅 들어오는 상대를 확 밀쳐내 버리는 스타일이라.

 내 주변엔 꾸준히 연락하는 친한 친구도 거의 없고.

 옛 직장동료와 가끔 만나거나 하지만.

 거의 혼자 돌아다니는 족속이니.

 

 

 가족조차도 뭐 그럴 수도 있지 싶다.

 뭐 날 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적당히 적당히.

 지금처럼 간격 칼같이 두면서 나는 내 영역 안에서 지내지 싶다.

 사람 천성 어디 가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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