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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Apr 26. 2016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화자"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처음 접했던 건 20살 때였다.

 학교가 집과 멀어 버스를 타면 한 시간 반이 걸렸다. 그 전에는 딱히 책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고, 책에 관심이 있었다 한들 맘껏 읽을 시간 같은 건 없던 시기였다.

 그저 언니 방에서 집히는 책을 들고 버스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었다.

 

 <상실의 시대>

 그 유명한 책. 을 나는 유명한 건지. 이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로 읽었었는데.

 그때도 내가 느낀 건.

 어. 이 사람 나와 비슷해. (요전에도 내가 나랑 비슷하다며 설레발을 떨었었지만. 무라카미는 그 최초의 설레발을 강렬하게 준 작가였다.)

 

 

 그 뒤로 무라카미의 책은 모두 읽었고. 소중히 간직했다.

 그 당시 워드로 리포트를 막 처음 쓰던 시절이라. 워드가 서툴렀던 나는 <상실의 시대>를 컴퓨터 자판으로 타닥타닥거리며 자판 연습을 하기도 했었다. 마치 내가 쓴 작품이라는 거 마냥. ㅎㅎ

 

 무라카미가 작품을 내면 가장 먼저 달려가서 소중히 사들고 집에 오곤 했다.

 단편, 중편, 장편소설과 에세이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읽곤 했었는데.

 1Q84를 읽을 때는 왠지 잘 읽히지가 않았고. 그 당시 몸과 마음이 다 피폐했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두껍고 이해되지 않는 글들을 애써 읽기가 버거워 1권만 읽고 그만 포기를 했었다. 여태 그 뒤의 책은 사서 읽지 않았고.

 나는 어쩐지 무라카미가 가장 소중히 생각할 그의 장편소설들이 내게는 그렇게 썩 재미나질 않았구나 하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뒤로는 (장편소설 나온 게 그 뒤로 없었지만) 중편 이하의 소설이나 에세이는 즐기며 읽었다.


 


 "처음에 소설을 쓰자고 마음먹었을 때 대체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전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부모님 세대처럼 전쟁을 체험한 것도 아니고, 한 세대 이전 사람들처럼 전후의 혼란이나 굶주림을 경험한 것도 아니고, 딱히 혁명을 체험한 적도 없고, 치열한 학대나 차별을 당한 기억도 없습니다. 비교적 평온한 교외 주택지의 평범한 직장인 가정에서 컸기 때문에 별다른 불만이나 부족함도 없고 유난히 행복한 건 아니어도 딱히 불행할 것도 없이, 이렇다 할 특징 없는 평범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교 성적도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이것만은 꼭 써야겠다!'라는 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라카미는 자신의 내면으로 더 깊이깊이 내려가며 글을 쓴다고 했다.

 어떤 묵직한 소재나 주변의 강력한 경험보다는 내면 속의 뭔가를 끄집어내가며 조합한다고.



"1978년 4월의 어느 쾌청한 날 오후 진구 구장에서.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고.'"

 

 

 2016년 2월 28일 새벽 1시.

 나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내 집 안에 어떤 할머니와 중년의 두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나는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쫓아냈는데 좀 겁이 났다.

 그 집은 틀림없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었다.

 괴팍해 보이는 할머니와 중년의 남자들은 구시렁거리며 다행히 집을 나갔다.


 좀 뒤에 다시 현관문을 요란하게 덜컹거리며 그 할머니가 다시 들어오려 했다.

 나는 좀 더 겁이 났고.

 위협하며 소리를 질러보지만 목소리가 전혀 나오질 않았다.

 이제 공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기어코 그 문을 열고 그 할머니는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소리를 지르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숨이 막힐 듯 공포에 질린다.


 그 순간 나는 안다.

 그 할머니의 이름이 "화자"라는 것을.

 그 할머니가 내게 알려준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그렇게 알았다.

 확실한 인지.

 강한 각인.

 그 할머니의 이름이 "화자"다!

 가슴을 부여잡고 공포에 차서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어날 때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벌떡 일어나 앉았고 공포에 질려 있었다.

 소리가 나오질 않은 게 가위눌림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 "화자"라는 이름이 너무나 강렬하게 인식되어서 나는 더 무서웠다.

 

 잠에서 깬 나는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시 문단속을 했는데 두 군데 정도 창문이 잠기지 않아 있었다.

 침대에 누워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일어나 "화자"에 대해 찾아봤다.

 첨엔 지화자.. 를 생각했으나. (어이없게도)

 화자의 뜻은 역시 "이야기를 하는 사람,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 말하는 사람."

 두 번째 뜻은 "죽은 사람. 혹은 변화하는 모든 것."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 있는 줄은 몰랐다. 가슴이 서늘했다.

 변화하는 모든 것?

 아냐... 역시 이야기를 하는 사람..?

 

 

 이건 뭐 내가 혹시 유명 작가가 되어서(그럴리야 없겠지만) 뭔가 계시를 받은 적이 없냐는 인터뷰를 받을지언정.

 딱히 내놓을 만하지도 않은 황당한 꿈이어서.

 어쨌거나 나는 전혀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저 강렬한 꿈 때문인지 뭔가 "화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생기고 말았다.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 tell a story입니다.

 (무라카미가 쓴 얘기입니다.)


"은행에 다달이 갚아야 할 돈을 어떻게든 마련할 수 없어서 부부가 고개를 떨구고 한밤중에 길을 걸어가다가 꼬깃꼬깃한 돈을 주은 적이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지 신의 인도하심이라고 해야 할지, 신기하게도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액수였습니다.(내 인생에는 왜 그런지 이따금 이런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 나도 저런 적 있었다.

(내가 뭐 무라카미 같은 작가가 될 거예요~ 하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있었습니다.)

 

 

 

"젊음이란 실로 멋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좀 곤란하지만."

 

 곤란하죠. 진짜. 저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현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 작품들에 아낌없이 시간을 들였고, 카버의 말을 빌리자면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을 써내려고 노력했다는 정도입니다. 나의 어떤 작품도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일 잘 못 쓴 것이 있다면 그 작품을 쓸 시점에는 내가 아직 작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다-단지 그것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일관적으로 학교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지독한 성적이었다든가 낙재생이었던 것은 아니고. 뭐 그럭저럭은 했던 것 같은데. 공부한다는 행위 자체를 원래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실제로 별로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뭐, 좋게 말해서 중상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타인과 순위를 다투는 일에 옛날부터 별로 흥미가 없었다는 것도 있습니다. 무슨 폼 나는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점수라느니 순위라느니 편차치라느니. 그런 구체적인 숫자로 표시되는 우열에도 어쩐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습니다. 이건 뭐 타고난 성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해. 비슷합니다.

 

 

 

 "그나저나 학교가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다. 학교에 가지 못해 너무 섭섭하다.라는 사람은 어쩌면 소설가는 못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소설가란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자꾸자꾸 만들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수업 중에 선생님 말씀은 제대로 듣지 않고 온갖 공상에 빠져들었던 듯한 느낌이 듭니다."

 

 오호.


"사십 대에 다시 '신인 상태'로 리셋했다고나 할까."

(미국에서, 일본 등단할 당시(신인 때) 했던 일을 다시 했을 때를 떠올리며 했던 말)

 

 

 나는 자꾸 누가 40대에 뭘 했다 그러면 득달같이 달려가 그 문구를 적어 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해한다. 요즘.

 


"글을 쓰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면 순서 있게 뭔가를 생각하지 못한다. 피지컬하게 내 손을 움직여 글을 쓰고 그것을 몇 번이고 되짚어 읽어보고 세밀하게 고쳐 쓰는 것에 의해 겨우 나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남들과 비슷한 만큼 정리하고 파악할 수 있다."

 

 다른 책에서 저 문구와 비슷한 뜻으로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쓰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나는 그의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더 좋아하는 쪽이고.

 그의 책을 읽을 때면 소울메이트를 만난 거 마냥 팔딱거리며 좋아한다.

 

 

 이건 뭐 낯 뜨거운 자소서를 쓴 것 같은 기분마저 들지만.

 깊이깊이 애정하다 못해. 그가 정말 오래오래 장수해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책을 써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팬이라는 것. 을 그저 내가 혼자 지껄이며 행복해하고 있는 중.이라고 이해하였으면 좋겠다.

 

 

 "어쩌다 소설을 쓰기 위한 자질을 마침 약간 갖고 있었고, 행운의 덕도 있었고, 또한 약간 고집스러운(좋게 말하면 일관된) 성품 덕도 있어서 삼십오 년여를 이렇게 직업적인 소설가로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직도 나를 놀라게 한다. 매우 크게 놀란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요컨대 그 놀람에 대한 것이고, 그 놀람을 최대한 순수한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강한 마음(아마 의지라고 칭해도 좋으리라)에 대한 것이다. 나의 삼십오 년 동안의 인생은 결국 그 놀람을 지속시키기 위한 갈절한 업이었는지도 모른다."

 

 

 

 쓰고 보니.

 이번 글은 부디 적은 인원의 분들이 보기를 바라게 되는군요.

 좀 창피하달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고. 또 거짓말을 한 건 없음.

 

 


 부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수를 길이 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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