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주얼. 격식 캐주얼. 세미정장. 완전정장.
며칠 뒤면 다시 출근이다.
한 달 보름 정도의 짧은 알바지만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6시까지 근무하고 돌아와야 하니 출근은 출근이다.
아무리 알바라고 하지만-다녔던 곳이기도 하고-처음 며칠은 교육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여름 마이를 하나 보러 나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옷을 하나 봤다.
회색과 카키 중간의 빛깔에 린넨 같은(잘 모르겠다) 시원해 보이는 평범하고 단정한 쟈켓.
정장 살 일은 없을 꺼라 생각했는데 짧은 일을 하러 나갈 때도 복장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긴 하다.
매일 정장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정장이 오히려 유행을 탄다.
이 쟈켓 얼마예요?
.........
육십만 원이란다.
옷감이 싼 티 나지는 말고.
유행을 타지 않는.
무난하고 평범한 디자인으로 고르자 해서 고른 건데.
육십만 원.
뭐 그렇게 고급진 취향도 아니구먼 어쩌자고 육십만 원짜리 마이를 골랐나.
저런 옷은 도대체 누가 사 입나.
나는 로또가 되어도 저런 옷은 아까워서 못 사겠다.
너무 무난해서 거절하고 나올 트집거리도 잘 없는 옷이었다.
"더 돌아보고 올게요.. "
아이 간식거리만 사들고 덜렁덜렁 집에 돌아왔다.
열흘 정도 있으면 지금보다 좀 더 더울 텐데.
열어본 옷장엔 스트라이프 셔츠만 다섯 개가 넘게 걸려 있다. (나 무슨 저크버그.. 아니다..)
검은 바지에 셔츠만 입고 가긴 좀 그렇고.
이사할 때 정리해두고 건들지도 않았던 예전 옷들에서 세탁소 비닐을 벗겨본다.
거꾸로 걸려 있는 정장 바지들.. 검은색과 남색, 가끔 회색.
일자바지, 항아리 바지, 발목으로 좁아지는 바지.. 들.
아. 내가 이 바지들을 입고 출근을 했었지. 참.
하나하나 언제 어디서 샀는지 기억도 가물 하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정장 바지만 10벌이 넘게 걸려있다.
여름바지, 봄가을 바지, 겨울 바지.
그렇게 옷을 버려대도 살아남은 이 바지들.
역시 좀 값을 주고 산 바지가 가격 순서대로 입을 만했다.
마이는 뭐가 있으려나..
여름 마이, 여름 마이..
의외로 지금 입을만한 마이가 4개나 발견됐다.
린넨 흰 마이 하나, 카디건 형식의 흰색 하나, 카라 없는 남색 마이, 흐늘거리는 천의 남색 하나.
그중에 둘은 입을만하고. 나머지 둘은.. 입어도 되나. 괜찮나 싶은.
정장 입고 출근해 본 지 2년 가까이 되다 보니 요즘 여자들이 무슨 옷을 입고 다니는지 잘 모르겠다.
짙은 남색 일자바지를 하나 입고. 흰색 정장 나시를 입고.
마이를 하나하나 걸쳐본다.
현관 신발장에 높게 처박아둔 구두도 한 켤레 꺼내 구색을 맞춰보는데.
이게 참 기분이 묘했다.
나 진짜 이렇게 입고 출근하던 여자였지..
그 수많은 출근길을. 옷을 고르기도 귀찮아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장 무난하고 기본적인 정장들을 한꺼번에 구입해서 옷장에 걸어 두곤 했었다.
처음 직장을 다닐 때야 유니폼을 입었으니 정장은 필요 없었지만.
차차 연차가 올라가며 유니폼을 벗게 됐었고.
세일즈를 하는 시점부터는 정장을 사 입었었다.
잘 사는 동네에서 일을 할수록 PB는 복장에 신경을 썼다.
그게 처음엔 뭘 그렇게까지.. 했었는데.
막상 손님들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꾸미고 가꾸지 않으면.
가끔 그 겉모습만으로 직원을 신뢰하지 않는 손님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특히 시계.
남자들끼리는 또 시계에 예민해서.
부자동네에 발령이 나면 고가의 시계를 장만하거나 명품 구두 등을 구매하는 남자 PB들이 꽤 있었다.
무리해서 슬림핏의 와이셔츠를 사거나. 넥타이는 무조건 신경 써야 했고. 구두는 매일매일 반짝거려야 했다.
나는 그러나.
태생이 외모에 신경 쓰는 걸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물론. 단정하게 화장도 하고. 기본 스타일로 깔끔하게 정장을 하긴 했으나.
솔직히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막 본격적으로 세일즈를 하며 PB로 자리를 잡을 때쯤에.
모시던 지점장님이 소위 '잘 사는 동네'에서 세일즈를 하시던 PB출신 여자분이셨는데.
그분도 딱히 값비싼 옷을 입거나 하진 않았지만.
내 차림에 좀 불만이 있으셨던 것 같다.
어느 날엔가는 지점장님 차를 얻어 타고 퇴근을 하는 중에.
(지점장님은 원래 지점 근처에 살고 계셨고.
나는 다른 동네에 살다가 전세가 마침 만기가 되는 바람에. 지점 근처에 집을 알아보다.
마침 마음에 드는 집이. 지점장님 집 위에 윗집이었다!
괜찮으시겠냐 말씀드리니. 적잖이 당황하신 듯했으나.
내가 밀어붙여 계약을 해버렸고.
우린 주말에도 종종 만나는 사이가 됐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거나. 분리수거하는 날.
뜨아~ 하며 소리를 질러대던 직원들이 생각나네요..ㅎㅎ)
암튼. 그래서 같이 퇴근을 하려고 차에 올라탔는데.
그대~로 여성정장 할인매장이 모여있는 아웃렛으로 직행해버리셨다.
O.O;
"야. 온수야. 너나 나나 옷 이렇게 거지같이 입고선 영업 못한다이~
이 김에 옷이나 보러 가자!"
"아니, 이게 웬.. 옷까지 사주 시게요? 제가 너무 죄송한데.. "
"미쳤냐. 니 옷은 니가 사야지! "
"그럼 안 살래요.., 사주시던가.. "
피곤해 죽겠는 몸을 이끌고.
것도 모시는 상사랑.
아웃렛 매장을 돌아다니며.
이 옷 저 옷을 고르며.
배고파 죽겠는 몸으로 째려보는데.
그래도 꽤 내 취향에 맞추어서 옷을 골라주셨었다.
주로 회색. 파란색. 검정. 남색.
아웃렛 매장이라 꽤 할인이 되긴 했지만.
정장 여러 벌에 겨울 코트까지 두벌 골라 넣으셔서 금액이 상당했다.
어차피 입고 외부로 나갈 일도 있으니 사놓긴 해야겠다 싶어 그저 챙겨서 나오긴 했는데.
다음날.
새로 산 회색 코트에 새로 산 정장까지 입고 짠~하고 출근을 했더니.
똑같은 디자인에 색만 다른 코트를 입고 지점장님이 출근을 하셨다.
나는 회색. 상사는 파랑.
우리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
O.O
아이고. 똑같은 걸 사셨을 줄이야...
그렇게 그 일을 계기로 좀 신경 써서 입기는 했다.
조금 신경 써서 입기 시작하니 나 스스로도 진작에 좀 프로답게 보이는 외모가 중요하긴 하구나 인정도 하게 됐고.
그러나 역시. 정장 자체를 잘 좋아하지는 않아서.
그 뒤로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점장언니("쎈언니" 같으셨다. 말도 잘 통하고 해서. 내가 좋아하고 잘 따랐었는데.. 욕쟁이언니 잘 계실까 모르겠네..)와 차를 타고 아웃렛에 가서 옷을 휩쓸고 왔다.
그래도 그때 사두었던 정장들이 있어 결혼식 등의 행사가 있을 때는 한 번씩 꺼내 입게 되곤 한다.
작년에 면접 보러 갈 때는 심지어 원피스(어쩌자고 원피스가 두벌이나 있다. 이거 누구 필요하시면 갖다 드리고 싶다.. )에 저 하얀 린넨 마이를 입고 갔다가 멋지게 떨어졌었지.. 참 허무개그 같은 답을 던지고 와선. 나 면접 잘 봤다고 신나 했었는데.
뭐. 그 회색과 카키 중간색의. 하늘거리며 평범한 듯 고급 져 보이는 마이를 살 용기는 도저히 없으니.
저 중에 하나 입고 갔다가. 며칠 지나 우리끼리 일을 하게 될 즈음에는 좀 캐주얼하게 입어도 될 것 같다.
어차피 손님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너무 캐주얼하기는 또 뭐해서. 조금 신경 쓰이는 정도이니.
이게 참. 옷이란 게 그렇다.
내 옷은 중간이 잘 없어서.
정말 캐주얼하고 편한 옷이거나. 완전 정장이라.
이렇게 예전 직장이라고는 하나 알바를 뛰러 갈 때는 또 좀 신경이 쓰여 '완전 정장' 말고 '세미 정장'정도를 입는 게 알맞은데.
'세미 정장'은 또 새로 장만을 해야 하고.
그 캐주얼 복장도 정말 편하면 곤란해서.
그러니까.
완전 캐주얼. 격식 캐주얼. 세미 정장. 완전 정장. 이게 왔다 갔다가 잘 안된다.
완전 캐주얼은 그야말로 혼자 다닐 때. 서점 가고. 애 데리고 놀러 갈 때.
격식 캐주얼은 동네 엄마모임이나(절대 티 안 내고 멋 부리는. 절대 신경 안 쓴 듯 그러나 시크하고 고급 진) 알바.
세미 정장은 기본 마이 정도는 입어주고 단화나 슬립온.
완전 정장은 힐에 정장. 정말 백화점 마네킹이 입고 있는 완전 정장.
지난번 알바 때도. 월급 받기도 전에 가벼운 바바리를 하나 샀었지.. 참.
이게 그렇다니까.
일 하려면 다시 돈이 든다고.
옷 사고. 점심 사 먹고. 커피 사 먹고. 차비도 쓰고.
아. 근데. 솔직히.
좀 잘 보여서.
이 알바를 좀 주기적으로 자주 했음 하는 바람도 있다.
정식으로 매일 출근은 자신 없고.
요렇게 한 달 일했다가. 쉬었다가. 다시 한 달씩만.
좀.. 지나치다 싶은 '완전 정장'을 하고 갈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