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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May 30. 2016

나는 니 애미가 아니다.

모질라는 신랑을 바라보며 나는 또 호흡을 가다듬는다.


 알바를 한지 벌써 2주가 넘었다.

 

 

 일을 하니 역시 체력이 딸린다는 게 느껴진다.

 6시 칼같이 퇴근을 하지만. 집에 도착하면 거진 7시가 되어 있고.

 그때까지 엄마를 기다리며 배고팠을 딸을 위해 얼른 저녁을 차려준다.

 나도 같이 한 숟가락 먹긴 하지만. 이내 나가떨어지고 만다.

 

 

 

 저녁에 퇴근하면 딸아이의 저녁을 차려주고. 한 시간 정도 잔 다음.

 신랑이 일찍 들어온다고 하면 다시 신랑 밥을 한다. 신랑은 국이 꼭 있어야 하므로 국이나 찌개, 한두 가지 반찬을 새로 한다.

 그다음은 당연 설거지.

 퇴근하자마자 돌린 빨래를 널고. 마른빨래를 개키고. 아이 숙제 챙기기.

 일주일에 한두 번은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도 한다. 좀 덜 피곤한 날을 골라.

 분리수거하는 날에는 당연 분리수거도 해야 하고. 중간중간 음식물쓰레기도 처리하고. 장도 한 번씩 봐 둬야 한다.

 모든 워킹맘의 일과..라고 얘기하려다 잠깐.

 이건 모든 워킹맘의 일과가 아니더라는 걸 요즘 깨달았다.

 그러니까 요즘 맞벌이를 하는 젊은 남편들은 이 살림 중의 상당 부분을 도와준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우리 집 같은 경우는.

 예전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를 하는 기간에 입주 아주머니가 함께 생활하셨고.

 신랑은 물론 나조차도 거의 살림에는 손을 댈 일이 없었다.

 그중에 마지막 아주머니는 거의 8년 동안이나 우리 집에서 같이 사셨기 때문에 딸아이까지 살뜰히 챙겨주셔서 아이는 거의 아주머니를 엄마 대신으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랑만큼은 아니어도 나 역시 야근이 많았고.

 그때는 내 몫의 일을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야근이 아니더라도 퇴근해 돌아오면 완전 뻗어버리는 일상의 연속이었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단순 알바라고 할지라도.

 이번에는 신랑에게 요구를 했다.

 나도 일하고 너도 일하는 기간이니. 아줌마도 없고.

 당신도 살림을 분담해서 하자.

 일찍 온다면 밥을 해주겠다. 피곤하지만 밥은 챙겨주마.

 대신 그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 정도는 처리를 해라. 딱 요거만 해줘도 내가 훨씬 수월하다.

 

 

 첫날엔 입이 댓발 나온 채로 설거지는 했다.

 음식물 쓰레기까지 탈탈 털어 봉지에 담아야 하는데. 그건 생략하고. 프라이팬도 안 닦고 해서 다시 추가 설거지를 해야 했지만.

 연달아 술을 마신 탓에 그 날은 일부러 일찍 들어온 듯했다.

 잠시 눕겠다며 들어가길래 나는 11시까지 기다렸다.

 더운 날씨에 혹시 날파리라도 생길지 모르는 저 음식물쓰레기를 처분해주기로 했으니까.

 11시 반이 되어 살살 깨웠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줘..

 피곤에 쩔은 신랑은 지금 이 시간에 어찌 나가냐며 모아두면 해주겠다고 했다.

 깊은 빡침이 올라왔으나 잔잔히 심호흡을 하며 참아냈다.

 나는 이미 '아이밥차리기, 설겆이, 신랑밥차리기, 빨래돌리기, 빨래개키기, 청소기돌리기'의 사이클을 마치고 완전히 지쳐있었다.

 

 

 다음날도 신랑은 일찍 들어왔지만 날름 밥을 먹고 영 도울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 날은 분리수거와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기로 했었다.

 나는 일찍 포기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분리수거와 음식물 쓰레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혹시 성이 좀 나서 문을 쾅 닫았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보니 신랑은-아마도-자는 척을 하며 누워있었다. 그리고 좀 시간이 흘렀을 때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무조건 해야 하는 그날그날의 살림이 있다.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일들이라.

 당신이 그중의 일부를 해주지 않는다면 그건 당연히 모두 내 몫이 되는 거고.

 내가 체력이 좋아 살림을 도맡아 하며 일까지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라.

 실은 매우 체력이 달려서.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물론. 나는 스트레스 별로 없는 알바이고.

 당신은 스트레스 만땅으로 술 약속도 많은 걸 알고 있으나.

 내가 요구하는 한두 가지의 살림은 꼭 본인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체력 안배라든지 스케줄을 조절해달라.

 아니라면 밥이라도 먹고 와라.

 나는 이 알바가 끝날 때까지 당신 밥을 안 하겠다.

 그게 제일 힘들다.

 설거지 안 하려거든 밥을 먹지 마라.

 내 새끼 밥은 챙긴다.

 이런 식이면 나는 다시는 일을 하지 않겠다.

 나는 살림을 하며 내 새끼를 살뜰히 챙길 테니

 너는 혼자 돈을 벌고 이왕이면 내 몫까지 좀 더 많이 벌어와라.

 

 

 

 읽었으나 답변이 없다.

 마누라 열 받으면 장문의 카톡을 보낸다는 걸 알고 있고.

 이 인간은 또 알면서도. 미안하단 말을 할 줄 모르는 꽤 고집 있는 양반이라.

 두고 보기로 한다.

 



 역시나 며칠은 술 약속에 늦게 들어오더니.

 어느 날엔 저녁 10시쯤 들어와 딸아이에게 슬쩍 묻더라.

 저녁 뭐 먹었어~?

 그 날은 딸아이가 졸라 햄버거를 사 와서 같이 먹었고 이미 싹 치운 상태.

 햄버거 먹었다고 자랑을 해대다가 딸아이가 아빠에게 물어보니. 아직 저녁을 안 먹었다고 했단다.

 나가보니 얼굴이 시커멓게 지쳐있다.

 필시 그 시간까지 일이 많아 저녁도 못 먹고 일하다 늦게 들어온 얼굴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맘이 약해진다.

 라면이라도 끓여줄까..

 신랑은 됐다며 안 먹으련다.. 한다.

 그리곤 무척 불쌍해 보이는 포즈로 쭈그린 채로 침대에 누워 잔다.

 나 보란 듯이.

 아주 불쌍하게 처량하게 쪼그린 채로.

 나 배고파. 나 배고파서 쪼그라들었어.. 하는 포즈랄까.

 

 

 

 다음날은 월급날.

 월급이 들어오면 바로바로 보내주던 신랑이 소식이 없다.

 그래.

 그래라 그럼.


 



 그다음 날. 신랑은 술에 절어 들어와 내게 이런 말을 해댄다.

 

 "왜 월급 달라고 안 해???

  내 월급이 아무것도 아니야??

  안 보냈는데 왜 달라는 말이 없어?? "

 

 

 

 O.O

 그래.. 일부러 안 보낸 거였군.

 그래서.

 서로 삐진 처지에 그래도 월급날이니 내가 꼬리 내리고 돈 보내달라고 말할 줄 알았다는 건가.

 근데.

 뭐 깜빡하고 안 보낸 걸로 생각했지. 의도적이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이 인간이 진짜. 나이 먹고 자꾸 찌질해질래.

 




 같이 맞벌이를 할 때야 둘 다 월급을 받으니 그 월급이라는 거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며 월급날이 크게 다가오지도 않았었다.

 내가 퇴직을 하고 신랑이 외벌이가 되었을 땐.

 그 당연했던 월급날이 얼마나 소중하게 기다려지는지.

 그 월급을 받기 위해 일하는 신랑이 측은하고 안쓰러워.

 월급날이 되어 내 통장에 마지막 끝전까지 알뜰히 보내주는 신랑을 위해.

 

 "여보(평소에 이 호칭은 절대 쓰지 않지만)~

  한 달 동안 수고했어.

  오늘 월급 들어와서 괴기 사 왔어요~~ 일찍 들어와! "


 요런 문자를 보내줬는데 생각 외로 어찌나 좋아하는지. 매달마다 월급날엔 고기를 사서 상에 올려줬다.

 뭔가 이 사람에게 그 느낌이 참 좋았던 모양이다.

 뭔가 가장으로 대접받는 느낌이랄까.

 아침 출근길에도 딸아이와 나란히 현관에 서서 인사를 하며 뽀뽀를 해주면 더없이 흐뭇해하고.

 퇴근해서 돌아와 삐삐삑 비밀번호를 눌러대면 또 달려 나가 되게 반가운 척 부둥켜안기를 해줬더니.

 언제부턴가 그게 너무 익숙해져서 달려 나오지 않으면 서운해할 지경이 됐었긴 했다.




 어찌 됐든. 신랑은.

 지가 하기로 한 살림을 흐지부지 도와주지 않아 내가 성이 났다는 사실은 저 멀리 날려버리고.

 월급날 간절한 마음을 담아 본인에게 생활비를 요구하지 않은 내게 진심으로 성을 내며 서운해하고 있었다.

 생활비를 벌어오며 한 달에 한번. 마누라 통장에 꽂아주는 맛이 있었다나 뭐래나.

 그게 저 사람에게 꽤 어깨 으슥할 중요한 일이었나 보다.

 그 중요한 일을 요구하지도 않고 무시하자. 뭔가 대단히 마음이 헛헛했었던 모양이며. 

 밥 또한 그랬다.

 혼자 몇 년을 외국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다 들어왔을 때 밥에 대한 묘한 집착 같은 게 생겨.

 밥을 안 챙겨주는 거에 대한 '서러움'같은 게 생기고 말았다.

 

 

 

 나는 또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신랑을 바라본다.

 이 남자는 도대체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주변에서 듣는 얘기도 없나.

 도대체 무슨 우리 아버지뻘 되는 세대의 사고방식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며 서운해할까.

 이 모지란 인간은 본인이 안 도와준 살림에 대한 미안함이 없다.

 아직 머릿속에 '살림'이란 단어가 들어가질 않았다.

 어쩌다 기분 좋은 날에 궁뎅이를 살랑거리며-매우 생색을 내며- 도와주기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생색용이지. 알아서 스스로 하는 경지는 절대 아니다.

 그저 밥을 안 챙겨줘서 왕삐침. 과 생활비를 벌어오는 가장을 무시(내가 언제?)했다는 왕삐침추가. 정도가 되시겠다.

 

 

 

 아. 이쯤 되면 호흡을 가다듬고.

 이 가여운 인간의 장점을 굳이 열심히 떠올리며.

 엄마 같은 마음으로 끌어안아줘야 한다. 다른 답은 없다.

 모지란 인간인 것이다.

 모지라다.

 모지라다.

 모질라다...

 

 그래. 알았다. 너 배고프고 서러웠구나.

 뜨끈한 밥에 좋아하는 국을 끓이고. 혹은 애정하는 잔치국수나 김치국밥 정도 해주면 껌뻑 넘어간다.

 후룩후룩 먹는 모습을 싸랑쓰런 눈빛으로 지켜보며 우쭈쭈쭈 해줘야 한다.

 

 그럼 또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당분간은 어찌나 말을 잘 듣는지.

 꼬리를 살랑거리며(그런 느낌이다)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널고 쟁여둔 스타벅스 카드나 상품권도 내밀고.

 며칠 동안은 "알아, 알아~ " 하면서 살살거리지만.

 술 약속 연달아 며칠이면 또 금방 찌든 얼굴로 집에 들어와 얼른 밥 얻어먹고 시체처럼 잠자기 바빠진다.

 

 

 

 그래 안다.

 나는 알바생이라 스트레스도 없고. (실은 되게 재밌다. 요즘.)

 당신은 일도 많고 야근도 많고 스트레스 쩔어산다는 거 나도 안다. 알지만서도.

 그래도 일 마치고 들어와 체력 딸리는 마누라가.

 퇴근한 후에 정성 들여 끓여준 국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설거지는 좀 해라.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고.

 어지르지 말고.

 분리수거도 좀 해라.

 

 

 

 나는 니 애미가 아니다.

 정신 좀 차리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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