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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설서정 Dec 25. 2023

스위스의 중국유학생

유럽 여행 중 만난 중국 유학생

라떼는 말이야, 대만을 자유중국이라 하고 대륙의 중국을 중공(중국공산당)이라 할 때 였다.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때는 방학숙제로 반공 표어 짖기와 포스터 그리기가 있어서, ‘때려잡자 공산당’이라고 하거나 ‘머리에 뿔이 난 빨간 사람’으로 표현하곤 하였다. 자유중국은 자유 수호의 최전선을 같이 하는 동반자이고 영원한 우방이었다. 

회사에서 대만 프로젝트를 담당하였다. 중국어 회화를 배웠고, 대만 유학 선배를 통해 사회,  역사와 사람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자유중국 대사관은 명동입구에 있었다. 발주처에 제출할 서류를 인증 받으러 자주 갔었고, 오가는 길에 대만 사장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 들려 짜장면과 군만두를 사먹었다. 대만 대사관에서는 복잡하고 커다란 중국어 입력 타자기로 서류 작업을 하였는데, 한자를 타자로 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90년대 초 봄이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근무하다 휴가를 맞아 유럽 여행을 하였다. 당시 해외 주재원은 6개월 근무에 휴가 3주를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항공편의 경유지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하여 2주간 유럽여행을 하고 귀국하여 남은 1주를 국내에서 보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초기였고, 리비아는 지중해 건너 유럽대륙과 가까워서 많은 회사 동료들이 유럽여행을 하였다. 

독일과 헝가리를 돌아다니다 스위스에 들어섰다. 베른을 거쳐 알프스 융프라우 정상을 구경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 성수기가 아니어서 열차 안은 한산했고, 4명이 마주보는 좌석에 그녀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일본인이세요?” 

“아니 한국인입니다. 그대는?”

“중국인입니다.” 

“중국? 대만 아니면 중공?” 

“대륙 중국입니다.”

처음 만난 중공 사람이었다. 얼굴이 빨갛지는 않았다. 

내가 건네는 서류를 사무적으로 처리하던 자유중국 대사관의 대만 여성과 다르지 않았다.  중공 여성은 젊었고 상냥했고 당당했다. 그때 해외여행을 하는 중국인이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보지 못했다. 유럽여행을 하면서 만난 동양인은 대부분 일본인이거나 대만인 또는 홍콩인이었다. 배낭여행 붐이 일기 시작한 초기여서 가끔 우리나라 젊은이 일행을 볼 수 있었다. 

회사에서 배운 중국어로 내 소개를 하였다. 손바닥에 한자로 이름을 적었다. 몇 마디는 중국어로 시작하였으나 곧 영어로 이야기했다. 가끔은 중고교 때 배운 한자를 이용하여 필담도 하였다. 그녀는 나의 중국어 발음이 정확하다며 과장스럽게 칭찬하였다.  


그녀는 스위스 호텔학교에 유학 중인 상하이(上海) 여성이었다. 몇 마디 물어보면 말이 정말 많았다. 중국어는 성조라는 말의 높낮이가 있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유난히 시끄러운 느낌이 드는데, 그녀는 조용하고 낮은 톤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한동안 대화상대가 없었거나 중국어를 몇 마디 하는 한국인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었던 모양이다. 나는 주로 질문을 던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영어는 알아듣기 편했고 발음이 좋았다. 주된 내용은 해외에서 공부하는 자신의 고충과 스위스 사람 뒷담화이었다. 당시 스위스는 세계에서 일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3만불 정도였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1만불이 안되었을 때 이었고, 중국은 모르겠지만 개혁개방 초기이었으니 형편이 그저 그랬을 것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1990년도 스위스 1인당 국민소득이 39,800불로 세계 1위, 우리나라는 6,610불, 중국은 347불이었다.) 


그녀는 호텔학교에 공부하러 온 유학생인 자신을 종업원으로 많이 부려 먹는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녀가 보기에 학교는 서양학생에 비해 동양인 유학생에 대해서 몸을 써야 하는 노동 실습시간을 많이 할당한다는 것이었다. 호텔학교에서는 경영, 마케팅, 국제관계, 식음료, 서빙, 객실 등의 여러 분야를 이론으로 배우고 실습을 한다고 한다. 그녀는 호텔 경영이나 마케팅 분야를 많이 배워 귀국하고 싶은데, 주로 식음료 매장에서 서빙만을 하게한다고 화를 냈다. 

자신은 수업료를 내는 학생인데 여종업원으로 착취당한다는 것이다. 당시 스위스는 노령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좋은 일자리는 장년층이 차지하고 있고, 생활비는 비싸니 젊은이들은 직업을 찾아 해외로 나갔다. 공원이나 관광지 어딜 가나 노인들 천지이고, 힘들고 노동력이 필요한 분야에 젊은이가 부족하니, 자신과 같은 외국인 유학생 특히 동양인을 이용해 먹는다고 투덜거렸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가난한 나라였고 국제적인 위상이 높질 않았으니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나도 해외영업하면서 겪은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맞장구쳤다. 한중인 2명이 알프스행 열차안에서 스위스 사람 뒷얘기를 하였다. 다행히 객실에 사람이 많지 않았고. 노인들이어서 외국 젊은이의 속삭임을 알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내려야 하는 역에 접근했다. 그녀는 더 가야 했다.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요?” 그녀가 물었다.

“융프라우 정상 갔다가 내려와서 바로 독일로 갈 겁니다.”

“오늘 꼭 가야해요?”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나는 멈칫했다. 

“일정을 맞추려면 가야 합니다. 다음에 볼 수 있겠죠.”

그녀가 내미는 손을 가볍고 잡고 일어섰다.


나는 몇 년 뒤 상하이(上海)에서 1년 중국어 어학연수를 받았다. 초기에 잠깐 그녀 생각이 났다. 유학을 마치고 호텔에서 일하고 있지는 않을까? 궁금했지만 찾아보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는 92년 8월에 자유중국 대만과 단교하고 중공과 수교했다. 경제개방 조치로 외국의 대 중국 투자가 급증했고 관광객도 늘었다. 호텔도 많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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