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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설서정 Mar 08. 2024

미련

리비아, 군대, 미팅, 연인

그녀 이야기였다. 틀림없이 그녀가 쓴 글이었다. 리비아에 근무할 때 서울 본사에서 2주일에 한번 우리나라 신문, 잡지, 책과 방송 녹화 테이프를 모아 보내주었다. 회사는 국제우편보다 정기적으로 오고 가는 직원편을 통해 주요 우편물과 서류 등을 보내고 받았다. 한국과 리비아 간 국제 우편을 이용하는 것 보다 빨랐고 신뢰할 수 있었다. 돈도 들지 않았다. 주요 신문과 잡지는 먼저 임원실과 부서장을 거쳐 낙수가 흐르듯 아래로 흘러 며칠 지나면 우리 사무실에도 전달되었다. 사무실 구석의 응접실에서 구문이 되어 버린 신문은 대강 주요기사만 보았고, 주로 주간지나 월간지를 하나씩 차지하고 읽었다. 그때 애독했던 잡지가 ‘샘터’ 이었다. 필진이 다양했고 독자 투고가 많았는데 어느 중학교 여교사의 글이 실렸다. 얼마 전에 결혼했는데 제자들이 우루루 몰려와 식장에서 축가를 불러 감동적이었다는 이야기이었다. 나도 감동적이었다. 기쁨 보다는 서글픔으로. 글을 투고한 중학교 여선생님은 내가 아는 그녀와 이름이 같았다. 이름과 직업이 교사라는 것을 제외하고 그녀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었지만, 또래의 투고자가 전하는 글의 분위기에서 왠지 그녀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녀가 맞을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면서 우울해졌다.   


20대 청춘의 절반을 군대와 리비아에서 보냈다. 밝고 찬란한 시절을 칙칙한 국방색 옷을 입거나 땀내 나는 열사 사막의 캠프에서 보냈다. 둘의 같은 점은 격리이다. 사회와 단절되고 친구와 멀어지고, 그리고 사랑이 떠나간다. 군대 가면 연인이 있는 경우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한다. 농담으로 지껄이는 경우도 있고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편지 자주 하고, 가끔 면회 가고, 휴가 나오길 기다릴께.” 라고 하며 손가락 약속을 하던 사이도 눈에서 안보이면 마음에서 멀어지듯 새 짝을 찾아 떠났다. 훈련소에서 이별 편지를 받고 하루 종일 시무룩해 하는 동료(군이니 전우라 해야겠지)를 몇 명 보았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 받으며 신상정보를 작성했다. 애인을 적는 칸이 있었다. 없다고 하니 인사 담당 병사는 반드시 애인을 적어야 한다고 했다. 없으면 비슷하거나 마음에 둔 여성이라도 적으라고 했다. 사유는? 탈영병은 반드시 애인을 찾으므로 추적의 실마리가 된다고 한다. 나는 누굴 적었더라? 생각나지 않는다. 도망가지 않았으니 군 추적조에서 연락하지는 않았겠지.  


리비아에 간다고 하니 부모님은 “그럼 언제 장가갈려고?” 라며 걱정하셨다. 당시만 해도 청춘 남녀 대부분이 20대에 결혼하였으니 3년을 리비아에서 근무하면 30대가 되었다. 부모로서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군 경험이 있었기에 리비아에 갈 때 인연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멀리 위문편지를 보내줄 여자친구를 소개해 줄까?” 라고 하였다. "아서라. 있는 애인도 도망갈 지경인데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라고 하며 마음과 달리 거절했다.


리비아는 군대와 다른 점이 있다. 급여가 많이 차이가 났다. 내 기억에 군에서 한달 월급으로 만원 미만을 받았다. 몇년 후 리비아에서는 그보다 백배 이상을 받았다. 회사에서 주는 휴가가 더 길었고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다. 3주 휴가 중 2주는 홀로 유럽 여행을 했다. 군은 제대하기 전에는 멋대로 그만 둘 수 없다. 나온다면 탈영이다. 리비아에서는 언제나 이탈이 가능하다. 해외 근무 중 중도에 귀국하거나 사직하는 직원이 있었다. 물론 인사평가에서 불이익을 받고 승진 대상자에서 제외되는 불이익이 있다. 리비아에서는 아침에 기상 나팔을 틀지 않았다. 대신 무슬림의 기도 시각을 알리는 아잔 소리를 들었다. 회사에서는 근무 시간 이후에는 자유가 있었고, 밤에 잠을 자지 않는다고 뭐라는 사람도 없었다. 회사에서 군대보다 훨씬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복잡한 일을 해야 했다. 


그녀를 미팅에서 만났다. 3월, 아직 봄은 오지 않았고 겨울도 떠나지 않은 추운 날 오후 학교 앞 다방에서 만났다. 그녀의 고교친구들과 같이 한 미팅이었다. "어느 학교 나오셨어요?" 라는 질문에 "선지여고 나왔어예." 라고 했다. 선지국의 선지여고이냐는 되물음에 그녀는 "선지여고 아니고 선지여고예요." 라고 강조했다. 나는 그제서야 "아 성지여고~"라고 알아들었다. 그녀는 적당한 키에 동그란 얼굴의 귀여운 타입이었다. 경상도 남쪽의 사투리의 특징인지 모르겠다. 말을 하는데 나에게 반말을 하는지 존대말을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지금 저에게 반말하는거죠?" 라고 물었다. 그녀는 "아녀예, 우리의 끝말 ~~예는 존대말이라예!" 라고 해서 웃었다. 미팅 끝에 애프터를 하지 않았다. 마음에는 들었는데 나는 그때 애프터라는 걸 제대로 몰랐다. 그냥 같은 학교에 다니고 학과도 근처니 가끔 보자고 했고 그녀도 그러자고 했다. 학교 다니면서 어쩌다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밤 늦게 그녀와 친구들의 하숙집에 찾아 간 적에 있었다. “밤 늦게 이게 무슨 짓이예요?” 라며 호통치는 친구 옆에서 그녀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들어 오라고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고개를 조아리며 얼른 뒷걸음쳤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 커피를 한잔 한적은 있다. 어리숙함과 미숙함이 겹쳐 그냥 흘려보냈다.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난 후 서로 전혀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그녀의 지난 청첩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제2의 군대 생활인 리비아에서 지지난달 잡지를 통해 그녀의 결혼 사실을 알았다. 제자들의 축가를 들으며 활짝 웃는 그녀를 글에서 보았다. 괜히 울적했다. 군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쓸쓸함이었다. 그때 잘할 걸 하며 후회했다. 리비아에 있지 않았다면 달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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