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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설서정 Mar 08. 2024

해외주재원 사모님

상하이 중국어 어학연수 같은 반 사모님

중국 상해의 대학에서 중국어를 1년 배웠다. 회사에서 파견한 어학연수생이었고 외환위기 발생 전이었다. 반에 우리나라 사모님이 있었다. 한 분은 공무원인 남편이 석사과정에 다니고 있었고, 다른 분은 남편이 내가 다니던 그룹 계열사의 중국 주재원이었다. 나머지 한 분은 중국인과 결혼하여 현지에 살고 있었는데 자식이 없었고, 한국인보다 젊은 외국인들과 친했다. 사모님 두 분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자식이 있었다. 사모님은 애를 학교에 보내고 어학당에 등교하여 중국어를 배우고 교우들과 어울렸다. 

첫 수업시간에 자기 소개를 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사모님이 다가와 인사했다.

“00 회사에서 연수 오셨군요? 제 남편도 00 회사 다녀요. 남편도 전에 중국어 연수를 했고 상해에 주재원으로 나온지 몇 년 되었어요.”

“아 그러세요. 사모님은 언제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셨습니까?”

“2년 되었는데 중국어가 서툴러요.”

“회사에서 중국어를 배워서 오신거죠? 발음이 좋고 잘 하시던데요.” 

“고맙습니다. 회사 연수원에서 베이징 출신 강사에게 배웠습니다.”

사모님은 남편과 같은 그룹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로 나를 반겼다.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아닌 직연이었다. 사모님은 단발머리에 얼굴이 갸름하고 피부가 하얗고 늘씬한 미인이었다. 남편 따라 해외 생활 경험이 있었다. 중국 발령이 달갑지 않았으나 살아보니 좋다고 하였다. 애들이 학교간 사이 중국어를 배우는데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했다. 남편을 따라 (일부는 아내를 따라 온 남편도 있겠지만) 중국에 온 배우자는 대부분 현지생활에 만족하였다. 당시 중국은 대외개방 정책으로 외국 투자가 늘어나고 외국인이 많았다. 다니던 대학에는 일본인이 절반 이상이었고 한국인, 미국인, 유럽인, 아프리카 사람들로 구성이 다양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보다 훨씬 소득이 높아 주재원은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여유가 넘쳤다. 회사 주택 지원금을 받아 외국인이 거주하는 지역의 중대형 아파트에 살았고, 운전 기사를 고용하고, 집안일을 도울 가정부가 있었다. 당시 상하이에서 대학 졸업자 월급이 우리 돈으로 2-30만원 정도였으니, 유명대학의 전공 대학생을 영어, 수학, 피아노, 미술 과외 교사로 쓰는 것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결혼한 여성이 해외생활을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첫째 시댁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라 한다. 경조사나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된다. 중국이나 동남아는 거리가 가깝고 시차도 1-2시간이니 필요하면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겠지만 일단 해외에 있다고 하면 모든 상황에서 빠질 수 있다. 물론 시부모나 친척이 자식이나 손주를 보러 날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쩌다 발생하는 일이다. 둘째는 영어 교육이다. 대부분의 직원은 선진국 영어권 국가로 발령받길 바란다. 영어권 국가가 아니어도 대도시에는 미국계나 영국계 학교가 있어 영어로 수업하고 현지어도 배울 환경이 충분하다. 외국인 학교는 학비가 많이 비싸지만 외환위기 전에는 회사에서 자녀 학비를 보조해 주었다. 주재원 사모님은 자식을 모두 외국인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셋째는 대학 특례입학이다. 해외생활의 기간과 시기에 따라 한국대학의 특례입학 자격이 달라진다. 초중고 12년을 외국 학교를 다닌 학생은 우리나라의 대학에 상대적으로 쉽게 입학할 수 있다. 졸업후 미국이나 영국의 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 고1을 포함한 3년 이상을 외국에서 다닌 경우도 특례 대상이 되는데 경쟁이 상대적으로 치열하였다. 자식이 고 1이 되기 전에 귀국해야 하는 경우 부모는 갈등한다. 외국인 학교에서 여유있게 공부하다가 귀국하면 초등학교부터 선행으로 다져진 한국 친구들과 경쟁이 만만하지 않다. 일부는 아이 교육 문제로 국내 본사로 복귀하지 않고 현지에서 타사로 이직하거나 자기 사업을 벌이는 직원도 있었다. 사모님도 애가 중학에 다니니 대학 진학 고민을 하는 모양이었다. 애들이 뒤쳐지지 않도록 한국에서 중고교 보충교재를 구입하여 학습을 독려하였다. 사모님은 수업이 끝나자 마자 애들 귀가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회사 회식이 있었다. 그룹사 전체 회식이었고 주재원이 아닌 나도 가야 했다. 고깃집에서 회식을 하는데 사모님의 남편이 술잔을 들고 내 옆에 앉았다. 대뜸 반말로 시작했다.

“네가 00 이구나, 집 사람한테 말 많이 들었다. 술 한잔 해라.” 라고 하면서 술을 권했다. 

“한 잔 따라 봐.” 잔을 비우고 머뭇거리자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따라 준 술을 바로 마시더니 다시 나에게 술을 권했다. 

“제가 술을 잘 하지 못합니다.” 라고 하며 나는 약간 뒤로 뺐다. 

그는 “집 사람이 칭찬을 엄청해서 대단한 놈인 줄 알았더니 술 한잔 제대로 못하네!” 하며 빈정댔다. 기분이 확 상했다. 그렇다고 상사 앞에서 내색할 수 없었다. “제가 술을 잘하지 못합니다. 한잔 더 드시죠.” 하면서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는 크지 않은 키에 앞 머리가 숭숭 비어가는 중년 남성이었다. 오랜 직장과 해외 생활에 노곤해진 얼굴이 보였다. 중국대륙에서 영업을 하느라 도시간 출장을 자주 다닌다더니 피로에 찌든 몸을 술로 해소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몇 년 후의 내 모습일 것 같았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자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고 일어났다. 음식점 밖으로 나왔다. 어둠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슬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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