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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설서정 Mar 08. 2024

주(周)여사

상하이 어학연수 시절 만난 중국 아주머니

“남조선.” 주(周)여사는 우리나라를 남조선이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묵던 호텔의 3층 담당 종업원이었다. 상하이(上海) 한 대학에서 중국어를 1년 배웠다. 회사의 어학연수 프로그램으로 동료 직원과 같이 베이징과 상하이의 대학에서 공부했다. 회사에서 대학을 지정하여 배정하였고 머물 장소로 호텔을 예약해 놓았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회사연수원에서 10주간 중국어 기초 교육을 받았다. 상하이에 도착한 날 바로 지사 직원의 안내로 학교에 가서 등록을 하고 호텔로 갔다. 대학에서 외부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3성급 호텔이었고, 유학생 기숙사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호텔은 어학원과는 캠퍼스 반대편에 있었고 후문이 가까웠다. 1층 프론트에서 장기 투숙객으로 등록하고 한달 숙박비와 보증금을 선지불하였다. 내가 쓸 방은 3층이었다.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을 올라가니 계단 옆에 조그만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주여사가 있었다. 호텔 복도에 놓인 책상이 그녀의 근무 장소이었다. 책상과 의자 하나 그리고 책상 위에 장부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가 나의 신원을 다시 확인하였다. 첫 질문이 “어느 나라에서 왔습니까?” 이었고 한국인이라고 하였더니 “아, 남조선!” 이라고 반응하였다. 나는 남조선 아닌 한국이라고 재차 말했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남조선이 한국 아닌가요?” 라고 되물었다. 당시 중국 호텔에는 로비의 프런트 외 각층에 안내 비슷한 종업원이 한 명씩 배정되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보기에 하는 일이 별로 없어 보였지만 그녀는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하였고 오가는 손님을 확인하였다. 들리는 말로는 호텔에 부부가 아닌 남녀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성이 호텔에 묵기 위해서는 부부임을 증빙하는 혼인 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공으로 칭하던 중화인민공화국과 92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중국은 북한과 일제시대부터 협력하였고 중국 본토를 놓고 공산당이 국민당과 싸우던 국공내전 시대에는 군사적으로 연대했다 한다. 

그후 매일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출근하기 전인 아침 일찍이나 퇴근 후인 저녁을 제외하고, 항상 자리에 앉아 숙박객이나 방문객을 주시하는 그녀 앞을 지났다. 수업을 오고 갈 때와 밥먹으로 갈 때 호텔방을 나서면 그녀는 나를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디를 가세요?” 라고. 나도 항상 “학교에 갑니다.” “밥먹으로 갑니다.” “댁은?” 등등의 답을 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그녀는 “수업이 끝났나 보죠.” “고생했어요.” “밥 먹었어요?” 라고 인사했고 나도 “수업을 마쳤났습니다.” “네, 밥 먹었습니다. 당신은?” 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가슴에 복무원(服務員) 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는데 중국어로 ‘복무’는 서비스라는 말이다. 그녀가 하는 서비스는 숙박객에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회사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갔지만 아직 초보이었고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녀와 무슨 긴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단순한 대화였지만 외국어 훈련을 위해서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녀 또한 외국인 특히 조선인이 아닌 한국인에 대해 호기심이 있었다. 아주머니 특유의 친화력도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인사말을 건네고 지나쳤지만 좀 얼굴이 익자 그녀 책상 앞에 멈춰 잠깐 대화를 하였다. 내가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녀는 깔깔거리며 떠들었다.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많았지만 차츰 이해도가 나아졌다. 그녀는 30대 후반의 상하이 사람이고 남편과 딸 하나가 있다. 남편은 사업을 하고 딸은 소학교 5학년이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도시락을 싸와 자리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귀가하다 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는 그녀를 어쩌다 볼 수 있었다. 다가가면 도시락을 덮어 가렸다. 시간이 지나자 내가 지나가도 개의치 않고 밥을 먹었다. 무엇을 먹나 보니 흰밥에 반찬 몇 가지이었다. 중국인은 북부 지역은 밀을 이용한 면을 많이 먹지만 상하이 등 양자강 이남은 쌀을 이용한 밥에 가지볶음, 청경채 볶음 등의 채소에 육류나 어류를 조리한 반찬을 같이 먹었다. 상하이는 황푸강이 도시의 6시쯤 방향에서 2시방향으로 흘러 동서로 갈라 푸동과 푸서 지역으로 나뉜다. 당시 푸동은 개발이 진행중이었고 도심은 푸서 지역에 있었다. 황푸강의 지류인 소주천이 다니던 대학교 남쪽에 있었는데 그녀 집은 소주천 너머에 있었다. 그녀의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하여 그녀 집에 갔다. 그녀의 집은 저층 아파트 4층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니 현관문이 2개 있었다. 둘다 그녀 소유였는데 한쪽은 대만 사람에게 세를 놓았다고 했다. 남편은 회사 부사장이었는데 문화대혁명 시절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하면서 외국에서 공부하던 나를 부러워했다. 딸은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한국?”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여사가 “남조선!” 이라 하자 “아 남조선!” 하면서 아는 체 했다. 학교에서 ‘꽃파는 처녀’를 보았는데 재미있었다고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북한의 유명한 혁명가극이라는 ‘꽃 파는 처녀’는 우리나라에서 금지된 영화이다. 한국인인 내가 그 감동깊은 영화를 보지 못한 사유를 초등학생에게 설명하기에는 중국어 실력이 부족했다. 과거 중국에 북한 유학생도 많았다고 한다. 나는 상하이에서 북한 유학생을 보지는 못했다. 베이징 등 북부 지역에는 조금 있었다고 들었다. 다니던 학교에는 일본 유학생이 다수이었고 한국 학생이 1/4, 나머지가 미국, 호주, 유럽 또는 아프리카 출신 학생 정도이었다. 주여사도 남조선 대신 한국에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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