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같은 세상 등에 업고 ‘거듭나기’

그럼에도 살아야 할 이유

by 김동준

2020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류를 덮쳤다. 인간이 만들어내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과학기술이 연약한 인간의 민낯을 훤하게 보여주었다. 더하여 수많은 자연재해들이 인류를 공격하고 있다. 아니, 인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70억 인구를 수용하느라 기침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2026년 AI,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이 편리한 인생 가운데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야만적인 모습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공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진행되는 살인. 국가 간의 전쟁 가운데 희생 당하는 젊은 청년. 뉴스를 볼 때마다 여기가 초등학교 때 그토록 기다렸던 [미래]인지 잘 모르겠다. 몇 주 전에 봤던 우크라이나에 있던 두 청년의 얼굴이 아른 거림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와 지구라는 터전 가운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 가운데 인간이 살아가는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며 인간은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똑바로 마주 봐야 한다. 바로, ‘질병’과 ‘자연’, '관계' 가운데 다가오는 공포와 불안 속 자신이 누구인지를 까먹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하여 ‘질병’과 ‘자연’, '관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느끼기 이전의 세상 속에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묻고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계속해서 펼쳐진 무한경쟁의 사회, 어떻게든 가지고 축적하기 위해 인간이길 포기함이 ‘성공’의 기준이 되어 버린 상황 가운데 인간은 살아왔다. 추론을 할 수 없고, 논리적이지 못한 이들을 미개하다고 말하며 의도와 추론이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비난하고, 무시해 버리는 상황 가운데 어쩔 때는 가해자가 되고, 어쩔 때는 피해자가 되는 상황 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순응하면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 즉, ‘자신’을 묻기커녕 남에게 손가락질하며 자신을 망각한 가운데 인간은 살아왔다. 질병과 자연, 관계의 공포 가운데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평소 살았던, 이제야 아름답게 느껴지는 과거의 일상을 돌아보면 자신을 찾을 수 있겠다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사실 인간은 자신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폭풍전야’를 '평화'로 착각하며 ‘침묵’하고 살아갔던 ‘인간’이 ‘폭풍’을 마주했다. ‘자신’을 물을 정신도 없고 ‘왜’라는 질문을 피하는 세상 가운데 대부분의 인간은 무릎 꿇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강상중은 팬데믹 그 자체인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도 인간은 계속해서 무엇을 만들어 가고 있고, 삶의 의미들을 발견하고,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하여 이겨낼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쌓았던 문명들과 자본들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지는 상황 가운데 드디어 인간은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의 죽음 가운데 안타까움과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우상으로 삼지 않는 애도 가운데 불합리한 죽음을 되새기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은 아닐까 생각하며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가운데 한 ‘연’을 나누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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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자비는 인간의 가슴을,

동정심은 인간의 얼굴을 지녔기에.

사랑은 신성한 인간의 형상을,

평화는 인간의 의복을 입었기에.

윌리엄 블레이크, 신성한 형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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