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앎’에서 불순한 ‘삶’으로

정진홍 교수의 경험과 기억 4-5부를 읽고

by 김동준

인류의 소통매체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언어'이다. 언어의 효과로 인하여 ‘종교’ 또한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고 존재한다. 이러한 ‘언어’는 세 가지의 결들을 가지고 있다. 딱딱하게 나누자면, 첫 번째는 사실을 기술하는 언어로 ‘인식의 언어’라고 불린다. ‘인식의 언어’는 ‘앎’의 언어다. 정보를 전달하고,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이는 언어다. 두 번째로는 ‘상상의 언어’가 있다. ‘상상의 언어’는 사물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사물을 만들어내는 언어이다. 세 번째로는 ‘고백의 언어’가 있다. ‘고백의 언어’는 ‘삶’의 지평에서 드러나는 ‘언어’다. ‘지식’과 ‘정보’를 위한 것이 아닐뿐더러,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내는 언어가 아니다. ‘삶’ 가운데 말할 수 없음을 경험한 언어를 의미한다. ‘고백의 언어’는 ‘무엇’과 ‘어떻게’를 모두 포함하는 ‘왜’라는 근본 질문을 가지고 있다.


‘고백의 언어’는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기에 단순히 ‘무엇’과 ‘어떻게’만을 원하며 주장하는 ‘인식의 언어’와 ‘상상의 언어’와 같이 쉽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적인 언어다. 그렇기에 고백의 언어를 가지고 상대방과 '말함' 중에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자신의 언어만이 '순수'하며,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하지만 작금의 종교는 ‘절대’와 ‘순수’, ‘힘’에 목매달고 있다.


'고백의 언어'를 통해 최초로 만들어진 종교는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한 ‘공동체’였다. ‘공동체’로 그대로 있었으면 좋았건만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던 ‘언어’가 ‘공동체’ 가운데 ‘자아도취’에 빠져 버렸다. 그로 인해 ‘공동체’는 ‘집단’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집단’의 소유물이 되어버린 ‘고백의 언어’는 수직적 위계구조를 통한 종교권력을 보호하고 대외적으론 종교 갈등을 일으켰다.


‘고백의 언어’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강요’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렇기에 ‘종교’는 자신들의 ‘언어’를 열어 놓아야 한다.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통하여 표출된 것이 ‘종교’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단순히 ‘집단’ 가운데서의 ‘가르침’과 반복되는 ‘강요’가 아닌, ‘삶’ 가운데 일어난 자기만의 고백이 ‘종교’임을 고백해야 한다.


더하여 ‘언어’의 한계에 대해서도 고백해야 한다. ‘언어’가 자신의 ‘삶’의 ‘경험’을 전체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고백의 언어’는 일회적인 것이 아닌, 계속해서 진행되고 되물어야 하는 ‘언어’ 임을 인정해야 한다. 더하여 ‘종교’는 ‘신화’와 같은 방식으로 있다. ‘신화’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등장하였다. 이 ‘언어’는 단순히 ‘상상의 언어’가 아니다. 자신의 ‘삶’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것을 논하기 위한 ‘고백의 언어’인 것이다.


'고백의 언어'는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과 진정한 인간성을 드러낸다. ‘지식의 언어’는 한계를 가진다. ‘앎’의 언어는 ‘삶’을 전부 설명하지 못한다. ‘삶’은 동사고, ‘종교’ 또한 ‘동사’적 실재를 논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의 언어’는 ‘명사’적 실재만을 논하고 있다.


계속 말했듯, ‘언어’와 ‘종교’는 크나큰 간극을 가지고 있다. ‘언어’는 앞에서 말했든 가장 효율적인 소통매체이지만 ‘종교’를 전부 드러내지 못한다. 더하여 ‘종교’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가 ‘종교’ 전체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예술’이라는 인간의 ‘몸짓’이 등장한다. ‘예술’은 지적 언어의 한계를 보여 준다. 이제껏 ‘종교’는 ‘앎’은 ‘실재’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앎’은 ‘실재’를 보여줄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실재’는 ‘실재 아님’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언어’에 접목시킨다면 ‘언어’에는 ‘언어 아님’, ‘침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앎’ 만을 ‘있음’ 만을 논하며 흘러왔던 ‘종교’는 한계를 인정하고, ‘삶’을 논하며 ‘종교’를 깊게 사유해야 한다.


이러한 ‘예술’ 가운데 정진홍 교수는 ‘문학’이라는 장르를 선택한다. ‘문학’은 ‘상상력’을 포함한다. ‘문학’ 속 ‘상상력’은 사물이나 사실을 ‘겪으면서’ 삶 자체가 의미의 자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고, 마침내 그 의미를 누리고 확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삶’ 속에서 ‘자유’와 ‘가능성’으로 수행되고 말해질 수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제한’ 가운데 인식의 덧없음과 무지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속 유한한 존재임을 되새김당하는 갸륵한 존재자다. 이러한 인간에게 상상력은 ‘넘어섬의 능력’이다. 이러한 ‘넘어섬의 능력’은 계속해서 휘몰아치는 한계에 ‘인간’이 매몰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넘어섬의 능력’은 ‘정보’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삶’ 가운데 있는 ‘한계’ 속 끊임없는 ‘물음’ 가운데 나타나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넘어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문학’이 ‘앎’의 종속되어 버린 ‘종교’를 해방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단순한 ‘지식’과 ‘정보’, ‘자아도취’를 위한 독단적 해석을 뛰어넘고, 각 개인이 가진 ‘상상력’과 ‘자유’의 장 가운데 ‘인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문학’과 같이 ‘종교’가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문학’을 포함하고 있는 ‘예술’을 이렇게 정의한다. “‘예술’은 사실의 ‘의미’를 창조하는 의미에서 진실인 것이다.” ‘예술’은 ‘사실’ 자체를 논하지 못하는 ‘한계’를 인정한다. 그렇기에 ‘삶’ 가운데 ‘의미’를 논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고 고백한다. ‘종교’ 또한 ‘교리’와 ‘경전’이라는 ‘언어’만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닌, 각자 살아가고 있는 ‘삶’과 그 가운데 나타나는 ‘의미’를 논하는 것이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식의 언어’는 ‘실재’를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집단’은 ‘지식의 언어’가 ‘실재’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모름’에서 오는 ‘불안’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위약효과다. ‘모름’을 품고 그 가운데 계속된 ‘물음’과 ‘고백’이 참된 종교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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