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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츠 Oct 19. 2023

철학이란 무엇인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묻는 것은 철학이 아니다

한 유튜브 채널의 영상을 통해 오랜만에 학과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영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주 나온 "철학적" 질문이 있었다.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https://youtube.com/watch?v=FUbmX408lu4&si=H7OFxjvc-S52DHBB


이 질문을 볼 때마다 이건 철학적인 주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필요하겠다. 우선 해당 질문은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 영역에서도 충분히 다루고 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는 철학은 다른 학문 영역에서 다루기 어려운 주제/질문/방법을 여전히 처리하는 최첨단 또는 최후의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영상에서도 여러 사람의 답변들이 나온다. 해당 답변들을 몇 가지 검토해 보자.


답변 1. '계란'의 정의가 '닭의 알'이기 때문에, 알보다 닭이 먼저다.


이 답변은 논거가 우선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한 단어의 정의가 명확한 사태를 모두 100% 반영하여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어 '~의'의 의미상 앞("닭")에 놓인 것이 뒤의 "알"보다 시간상 순서로 무조건 앞선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계란을 "닭의 알"로 해석해야만 가능하기도 하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계란을 "닭이 나오는 알"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냐며 쉽게 반박을 제기한다. 이러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으로는 결론이 나지 않는다. 올바른 방향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답변 2. 진화생물학의 논의에 따르면 닭이 먼저다? 계란이 먼저다?


영상에서 결론이 닭이 먼저였는지, 계란이 먼저라고 말했는지는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답변의 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부분은 '진화생물학의 논의에 따르면'이다. 강의 중인 철학과 교수님이 질문을 받고 답변을 했던 내용인데, 그 교수님도 이 질문을 철학적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학문을 끌어들였을 거라고 본다.


답변 3. 다른 답변으로 의대생의 "생물학적인 ~", 통계학과 학생의 "통계적으로 보면 ~"의 답변이 있었다.


이러한 답변은 2번 답변과 큰 틀에서는 같은 구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생물학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지라도, 온전히 통계만으로는 정확한 답변이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해당 주제(닭과 계란의 선후)를 다루기에 적절한 학문 영역을 찾고, 그 영역에서 답변을 하고 연구를 해 나가면 될 분야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어떻게 답변하고 싶은가?


1. 철학은 기타 학문들에서 다루지 못하는 영역을 '여전히' 다루는 학문이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다. 과거 유명한 학자들(예를 들어, 데카르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은 한 명이 수학자, 철학자, 과학자, 의사, 생물학자 등등 여러 학문에 동시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 건 현재의 학문 구분법을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빈치는 본인을 '학자'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 철학 이래로 세상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답을 했던 그 행위 자체가 철학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철학자'에 가까울 것이다.


심리철학의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정신 또는 마음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해당 답변의 여러 사조가 있지만 현대에 와서 위세를 떨치는 흐름은 물리주의에 기반한 답변이다. 쉽게 말해, 신체의 물리적인 현상이 있고 그중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 물리적인, 생물학적인 것으로 모두 해석을 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단순히 "마음"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언어 습관에 남아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다른 단어로 칭하거나 'XXX 뉴런의 특정 신경 전기신호에 따른 과정' 등으로 번역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을 바탕으로, 현대의 정신과적 치료에 물리적인 약물을 통한 호르몬 조절이 주된 방법으로 쓰인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정신과적 치료의 과거 흐름은 정신분석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음'이란 물리적인 신체와는 별도로 존재한다는 시각을 전제로 하여 가능한 접근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마음', '정신'과 같은 것에 대해서 물리주의적인 접근에 기반해서 분석하고 치료를 하는 영역은 더 이상 철학의 영역에 남아 있지 않고, 현재 생물학, 물리학, 의학 등의 분과 학문으로 떨어져 나갔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음'과 '정신'의 모든 측면을 분석하고 파악해내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리주의 흐름과 정식분석학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여러 분과 학문으로 '마음'을 분석하는 방법들이 떨어져 나오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고, 또 새로 발굴될 '마음'에 대한 논의는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 철학이 있다고 본다.


2. 철학은 여러 학문을 메타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근본적'이다.


“메타 인지” 덕분에 '메타'의 뜻이 유명해지고 조금 더 인지도가 높아진 듯하다. 즉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인데, 철학의 방법론에 두드러지는 것이다. 모든 학문들은, 또는 모든 지적인 활동들은 특정한 무엇인가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이야기를 진행하게 된다. 그런데 단순히 A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만 묻고 답하려면 논의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에 앞서 '존재'에 대해서 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존재'는 어디에서 다뤄야 할까? 다뤄야 하는 학문이 있다면 철학이고, 또는 과학철학, 종교철학처럼 철학의 영역에서 다루게 되는 주제이다.


과학철학 교과서의 첫 장은 대개 과학과 비과학은 각각 무엇이고, 어떻게 다른지, 즉 과학/비과학을 구획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과학은 과학 내부에서 다루지만,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의 경계는 항상 논란이 생길 수 있으며 그 경계는 과학이 아닌 철학의 영역에 가깝다. 현재 '과학’은 확실하게 과학이라고 받아들여진 영역 내에서의 탐구이며, 위 구획에 관한 논의에 따라 과학은 추후 다른 것으로도 통째로 바뀔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있다. 중세에는 지동설은 과학이 아니었다고 한다! (현대 과학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천동설은 멍청한 소리 같지만, 그 시절에는 천동설 또한 나름대로 이론적 체계를 정교하게 갖춘 하나의 학문 성과이기도 했다.)


또한 '존재'를 정의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용례 1) 우리 눈앞에 스마트폰이 존재한다.


가장 흔하고 일상적인 정의이다. 다른 제한 조건이나 맥락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눈앞에, 물리적으로 인지 가능한 형태로 특정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때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용례 2) 신은 존재한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이지만, 다른 의미의 존재를 논하기에 적절한 예이다. 유신론자 중 1)의 의미로 신이 존재한다고 하진 않고 다른 의미로 쓰는 입장을 생각해 보자. 신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의 말씀을 공부하여 신의 기운을 느끼며 믿음으로써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유신론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의미인지는 잘 와닿지 않지만 적어도 1)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용례 3) 중성자가 존재한다.


양자역학은 우리의 육안으로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또한 관찰자의 상태(빛)에 따라 관측 대상의 위치가 변경됨에 따라 확률적으로만 대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이런 존재 방식은 일상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대상을 관측 가능한 과학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용례 4) '존재'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이것은 1)~3)과는 차이가 더 큰 존재 방식이다. 특정 개념은 한 사람의 정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언어적인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분명히 "존재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외에도 '존재'에 대한 쓰임은 더 많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존재란 어떤 의미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은 이미 특정 의미를 전제로 한 영역 내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과학의 영역에서 위의 2) 의미의 존재는 아예 관심이 없다. 그 의미를 생각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에 논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각 학문의 테두리 바깥에서 철학이 메타적으로 근본적인 탐구를 수행하는 셈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며 또 다른 의미로 철학에 대한 정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철학'이 뭔지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추후에 이 글도 수정을 하거나 한번 더 같은 주제를 다룰 필요가 생길 것이라고 본다.



Image by Pexels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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