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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츠 Oct 28. 2023

초간단 니체 : [도덕의 계보]를 중심으로

필명이 “프리츠”가 된 사연

니체를 짧게 다뤄보려고 한다. 왜 니체냐면, 필명 “프리츠”가 니체의 이름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을 좋아하는데 그의 이름이 '프리드리히 니체'이고 여기서 따온 것이 프리츠(독일어 '프리드리히'의 축약형)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니체의 철학이 어떻고, 왜 좋은 지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전공교과명 '윤리학' 수업을 통해 처음 제대로 접한 니체다. 수업 주 교재는 [도덕의 계보]였다. 도덕 관념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를 겪으며 어떻게 생겨 났는지, 그 계보를 다룬 책이었다.


책 요지를 거칠고 다소 부정확할 수 있지만 쉽고 이해 가능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니체는 당시에 만연한 기독교의 도덕관념('선'과 '악')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우선 '좋음'과 '나쁨'이라는 단순한 개념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좋음'은 그냥 보기에 좋거나, 힘이 세거나 하는 단순한 의미에 가깝다. '나쁨'도 보기에 좋지 않거나, 힘이 약하거나 하는 의미이다. 어떤 도덕적인 평가가 담긴 것이라기보다는 추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게 좋은 것이고, 힘이 약한 것보다는 센 것이 대체로 좋다는 정도의 의미이다. 좋고 나쁨이라는 우리말 번역어가 약간의 도덕적 평가가 담겨 있게 들려서 오해가 될 수 있다면 그냥 good, bad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것도 감이 안 온다면 도덕적 평가 없이 그냥 힘세다/약하다, 그렇지만 힘센 게 아무렴 약한 것보다는 더 낫지 정도의 느낌으로 이해하고 일단 넘어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도덕과 무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를 통해 기존의 '좋음'은 '악'이 되고, '나쁨'은 '선'이 되었다. '세다/약하다'에서 출발해 보자. 기독교는 로마의 억압을 받으면서 순교자가 많이 나오게 되고, 카타콤 지하묘지에 숨어서 몰래 전도하고, 기도하며 지낸다. '억압'은 박해받던 기독교의 해석이다. 반면 기독교를 박해하는 로마는, 당시로서는 기독교가 사회의 주된 사상도 아닌 상태에서 이교도의 사상이요,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문제가 많은 사상으로 보고 '정당한 법 집행'(박해가 아님)에 나선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여기서 로마는 힘이 세고, 기독교는 힘이 약한 것뿐이다.


기독교는 계속해서 억압받는 자신들은 신의 뜻을 받들고 따르는 '선'인데, 박해하는 로마는 '악'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교세를 확장시킨다. 현실에서 대항할 수 없으니 일종의 정신 승리를 노린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공인이 되고, 현재 로마에는 기독교(가톨릭)의 중심인 바티칸이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덕과 상관없던 단순한 개념이, 도덕적 개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즉, 'good'은 '악'이 되고, 'bad'가 '선'이 되었다. 약한 자(기독교)들이 득세하면서 도덕의 우위를 점하게 되어, 강한 것(로마)은 악이 되었고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강하고 센 것들은 힘을 못 펴도록 억눌리게 되었다. 니체가 보기에 기독교가 득세한 세상의 인류는 현실 삶에서의 최고를 향해가는 것(힘을 더 계속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서의 영광을 위해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여기서 악취가 난다고 말한다.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 : 거기에는 소인의 냄새가 배어 있는 것이다. 대중이 먹고 마시는 곳에서는, 심지어 그들이 숭배하는 곳에서 조차 악취가 난다. 순수한 공기를 마시고자 한다면, 교회에 가서는 안된다.

- 니체, [선악의 저편] 中


강한 것은 어떤 국가적 장치나 제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천국을 노리며 현실에서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닌, 현실 속에서 더 나아지고자 추구하는 것들은 모두 '강함' 또는 'good'으로 볼 수 있다. 만약 내세에 천국에 가고자 하는 기독교 사상만 있었다면, 지금의 현실 세계 문명은 가능했을까?  


이러한 니체의 사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우상을 벗어나는 사고의 자유로움


당시에 기독교 사상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현재까지도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한 사상 체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일갈한다. 자기도 그 사상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을 것인데, 그 바깥에서 다시 검토해 보고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셈이다.

어떤 주장에 반대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것이 사회의 주류 내용이라면. 아니 회사에서 상급자의 의견이라면 쉽게 반대하기도 어렵다. 에너지도 많이 든다. 그리고 그만큼 자기 생각이 확실해야 이야기를 꺼내봄 직하다. 즉, 지적으로 부지런해야만 기존 사상 체계를 뒤집을 생각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성역을 뛰어넘어 스스로의 힘으로 사고했던, 자율성이 뛰어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2. 인간성의 실현을 지향함


단순히 성역을 뛰어넘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이 지향했던 방향도 맘에 든다.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 영광을 얻고 천국에 가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물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있는 이 현실 세상에서 인간성을 발전시키고 실질적으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던 게 아닐까?


여기까지가 프리드리히 니체로부터 필명 “프리츠”가 나온 사연이다.



(주의) 정확한 워딩, 이론의 상세 논리는 원전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보고 이해가 조금 되어 궁금하기 시작했다면 또는 알던 것과는 조금 달라 의문점이 생기는 부분이 생긴다면 직접 니체를 읽거나, 2차 저작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우선 브런치의 다음 글을 읽어봐도 좋다.


https://brunch.co.kr/@078854039763459/12



Image by GDJ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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