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길을 가다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되는 옷 브랜드를 발견했다. 위 이미지를 보시라. "DEUS EX MACHINA"라니! (옷이 이쁘긴... 한 거 같은데 너무 비싸게 판다.) 의류회사에서는 무슨 뜻인 줄 알고 썼을까? 오래간만에 이 개념이 눈에 들어온 김에 한번 글을 써봐야겠다고 맘이나 먹었다.
(Deus ex machina)
라틴어인 이 어휘를 영어로 바꾸면 'God from the machine'이다. 기계 장치에서 내려온 신이라는 뜻이다. 과거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극의 갈등이나, 플롯의 꼬임을 풀어내는 최후의 장치로 신을 등장시켜 모든 것을 한큐에 해결해 버리는, 그런 극적 장치를 의미한다.
요즘 드라마에서 마지막 화까지 끌고 가던 온갖 갈등 상황이나 떡밥을 '신'(꼭 신이 모습이 아니어도 좋다. 뜬금없는 무언가면 된다.)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이거 다 원래는 없던 일이고, 나한테 속은 거라고 말하면 우리는 신에게 감사하다고 할까, 이 드라마는 개연성을 무시하는 망작이라고 욕을 할까? 후자다. 실제로 이 개념이 나온 배경도 이러한 클리셰적 장치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 삶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내려오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일거에 모든 고민과 근심 걱정을 날려버리는 하쿠나마타타! 회사 생활을 하면서 기억 남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한번 있었다. 온갖 업무가 몰리면서 터지기 일보 직전, 이직 최종합격 및 처우 협의 완료 그리고 퇴사 통보는 아주 짜릿했다.
그해 9월에 새 팀으로 이동 발령을 받고 12월 중순에 퇴사통보, 12월 말일자로 퇴사를 했다. 9월에 새 팀 이동 직후부터 가관이었다. 선배의 육아 휴직 땜빵을 위한 표적 인사이동으로 팀을 옮기게 되었는데, 새 부서 사람들이 쌍수 들고 크게 환영하며 한 마디씩 건넨다. “고생 좀 해줘야겠다.” 기존에 해왔던 직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빨아 먹힐 일만 앞으로 펼쳐질 게 분명했다.
이동 직후 적응기도 주어지지 않은 채, 2달 동안 3개의 상품 출시 준비 및 임원 보고를 해치웠다. 할 수는 있다 치더라도, 이례적인 속도긴 했다. 그리고 연말까지 이거 해야 한다, 저거 해야 한다. 과장 승진 후 첫 부서 이동이었는데, 아 이제야 내가 받는 연봉보다 더 많은 일을 회사에 기여하게 되는구나를 실감하게 됐다.
그렇게 새 부서에서의 2달 만에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한 헤드헌터 담당자가 링크드인 프로필을 보고 A회사의 직무에 핏이 맞아 보인다고 연락을 준 것이다. 딱 나를 찾는 직무 포지션인 것 같았다. 이직을 아예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첫 회사에서 계속 다닐 생각에 얼마 전 집까지 장만한 상태였었다.
지금 부서에서 이렇게 뽑아 먹히기만 하면, 차라리 돈이라도 더 받고 하지! 그렇게 이직에 칼을 갈았고, 다행히도 합격과 좋은 조건을 얻어냈다. 그리고 이어진 퇴사 통보. 내게 주어진 모든 업무가 내 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시원했다. 이렇게 잘 풀려도 된다고?
여기까지가 직장 생활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가까운 것을 겪어본 이야기이다.
회사 생활이나 삶이 어려운 순간마다 신을 만난다는 건 쉽지 않고 그런 걸 기대해서 용하게 상황을 벗어나리라 꿈꿔봐야 좋을 것도 없을 것이다. 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기 때문에.
실제로 극작가들에게 뜬금없이 모든 갈등과 어려움을 봉합시키고 해소시키는 신을 등장시키는 건 금기에 가깝다. 그런 이야기가 우리 삶에 어떤 울림을 줄 것인지 불확실하고, 사람들에게 오히려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리라. 차라리 교훈만 없으면 다행이다. 이런 스토리 전개는 황당하기만 할 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내 회사생활에도 시도 때도 없이 신이 등장한다고 하면 재미없고, 그걸 나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로또 1등 당첨이라면 그것은 나의 삶이 분명하다. 확신한다.) 앞선 이야기에서 갑자기 이직 안내 메일이 우연히 날아오긴 했지만, 이직 서류를 쓰고 면접을 3번 보고 연봉 협상까지… 격무와 병행하느라 애를 많이 써서 겨우 얻어냈다. 그러면서 이직 성공했기에 더 짜릿했고 좋았다.
만약 이직 면접도 필요 없는 스카우트 제의가 온 것이라면 좀 더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가깝다고 할만하겠다. 그것도 신이 내려온 거라고 하기는 힘든데, 열심히 해놓은 회사생활과 평판 관리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회사 생활을 가지고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스토리를 만들어 막 갖다 붙인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 일상에서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끔 벌어지는 행운에 감사하고, 또 그렇게 삶을 계속 살아나갈 힘을 얻어가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아니면, 이참에 유신론자로 전환을 좀 해보면 신이 높은 확률로 더 자주 기계를 타고 내려와 주시려나? 10%에서 20%로 양적인 상승이 아니라, 0%에서 1%라면 무에서 유로 질적으로 변하는 거라 한번 해 볼만한데...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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