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관측, 인식론, 대응론, 참, 거짓, 감각질
가족이 헝가리 친구와 스카이프로 교류를 하고 있다. 영어 공부도 하면서 동시에 알지 못하던 문화, 사람에 대해서 새로 배우고 익히며 재밌어한다. 다른 문화를 배워가는 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음식이다. 그렇게, 우리 집 주말 저녁 메뉴는 헝가리식 라따뚜이(정확한 음식명으로는 Lecsó)로 정해졌다. 라따뚜이가 애니메이션 주인공 이름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음식 이름이었다.
대충 토마토와 여러 야채를 한솥에 넣고 끓여 먹는 모둠 야채 음식이다. 어떤 요리인지 궁금하신 분은 이 링크를 클릭해 보시면 된다. 이 글에 라따뚜이가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꼭 라따뚜이가 아니어도 한 번도 안 먹어 봤는데 직접 만들어서야 처음 먹어보는 요리라면 어떤 음식으로 대체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라따뚜이를 먹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먹은 라따뚜이가 ‘진짜’ 라따뚜이가 맞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다는 게 중요한 문제다. 레시피대로 얼추 만들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긴 한데 먹을만하고 나름의 맛도 있었다. 근데 이게 라따뚜이가 맞다고, 우리 가족 누구 하나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봉착했다.
아아, 이 다음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를 식탁에서 했더니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아 이 글에서 이어가고자 한다. 그렇다. 철학 전공자는 이런 이야기를 아무데서나 진짜로 꺼내는 습성을 드러내곤 한다. 나만 그런가? 하지만 보통은 (가족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현대 과학에서 천체 망원경으로 우주 현상을 관측하는 행위는 수단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적어 보인다. 망원경으로 처음 우주를 관측하던 시기를 떠올려보자. 지상에서 적당한 거리의 망원경 관측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는 망원경을 통해 확인한 상과 직접 해당 물체가 놓인 곳까지 가서 확인해 본 상을 서로 비교하여 그 정확성을 평가할 수 있다.
직접 걸어서 가서 확인할 수 없는 거리의 우주 물체를 망원경으로 관측할 경우는 어떠할까? 직접 우주까지 가서 그 물체가 망원경에 맺힌 상과 얼마나 비슷한지 평가할 수 있을까? 지구 내에서 망원경의 관측 상과 실제의 상이 같다고 하여, 지구 바깥에서까지 그대로 망원경 관측의 정확성이 유지된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천체 관측 도구로서 망원경이 자리 잡는 게 과학철학적으로 단순한 작업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필자의 과학철학 입문 시리즈를 참고하셔도 된다.)
라따뚜이의 실제 모습과 맛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내가 먹은 '라따뚜이'가 진짜 라따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역시 간단한 작업은 아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과학철학에서의 망원경 문제는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인식론 내 대응론 이야기로도 이어갈 수 있다. 인식론은 주로 지식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다루는 철학의 주요 핵심 분과다. 어떤 지식을 참인지 어떻게 판단할지 그 기준 등을 다루는 영역이다.
지식은 '정당화된 참된 믿음'으로 대개 정의된다. (1) 정당화 (2) 참 (3) 믿음이 중요하다. 여기서는 (2)만 보자. 참/거짓을 판별하는 주요 기준 중에는 대응론이 있다. '참'이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하고, 그것에 대응할 때 우리는 이것을 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상식적인 이론이다. 어떤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따져보려면 진짜와 같은지 살펴보면 된다.
아아, 내가 먹은 라따뚜이를 참된 라따뚜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냐... 우리 가족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온 라따뚜이만 먹어서는 이게 진짜 라따뚜이인 줄은 알 수 없다.
좋다. 헝가리나 유럽에 가서 라따뚜이를 먹었다고 치자. 그 라따뚜이는 진짜 라따뚜이일까? 100% 참된 의미에서 라따뚜이일까? 어쩌면 라따뚜이의 원형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현대적 퓨전이 가미된 어떤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라따뚜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아닐까? 라따뚜이에 관한 인식론적 대응론자라면 그들이 생각하는 유일한 라따뚜이가 상정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과 비교해야만 라따뚜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게 틀림없다.
가족이 열심히 라따뚜이를 먹어본 맛의 표현을 충실히 헝가리 친구에게 해준다고 가정해 보자. 친구는 표현한 그게 다 맞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가족은 우리가 먹은 라따뚜이가 맞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심리철학에서 다루기도 하는, 주관적인 느낌에 관한 언어적 표현의 한계를 생각해 보자. 같은 화면을 보고 "초록색"이라고 서로 표현한다고 치자. 내가 느끼는 초록색의 느낌과 타인이 느끼는 초록색의 느낌이 같을까? 즉 감각질(감각의 구체적인 질감, 퀄리티)이 같을까? 적당히 타협해서 우리 언어 중 적당한 "초록색"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 다양한 색깔의 배리에이션에도 불구하고, 색을 담는 어휘는 여전히 그 수가 적다고 느낀다. 이는 비단 색깔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언어 자체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유로 인해, 헝가리 친구가 네가 말한 라따뚜이를 먹고 느낀 맛 표현이 내가 느낀 것과 같다고 백번 말해준다고 하더라도, 진짜 라따뚜이를 먹은 것인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언어적인 합의에만 이르렀을 뿐일지도 모른다.
철학 중에서도 이러한 이론들이 내 맘을 사로잡는다. 이러하니 학문했다는 사람, 철학했다는 사람치고 확신을 가지고서 제 말이 진리인양 읊는 사람들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아아, 그냥 맘 편히 '진짜' 라따뚜이를 한번 먹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이젠 무슨 라따뚜이를 먹어도 진짜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겨버렸다. 이 글로써 식탁에서 하고 싶었으나 못다 한 이야기를 여기에나마 적어 보았다. 이제야 며칠 전 먹은 라따뚜이가 소화가 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