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철학과의 ‘쓸모’ 편
대입 공부 중 논술 면접 준비를 하며 스스로가 헛똑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주장을 하려고 하면 내 생각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는데 철학이 도움 된다더라. 그래서 고1 겨울 때부터 틈나면 머리 식힐 겸 철학 교양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었다. 처음 접했던 책은 아주 유명한 [소피의 세계]이다. 모르는 세계가 열려있었다. 교과 지식을 외우고 풀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과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그리고 깊숙히 사고하고 다루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고3 시절에 여러 가지 가정 상황 등으로 인생의 가치관에 큰 전환이 이뤄진 것도 한몫했다. 집이 어려우니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 가서, 빨리 돈을 벌든 고시 공부를 해서 소위 말하는 입신양명을 빨리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큰 전환 이후 내가 뭐 하려고 공부하는 거지? 내 삶은 뭘까?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뭐지? 좀 더 차근차근 알아가고 싶은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또, 사회과 교과목을 공부하며 생각보다 사회의 많은 제도들이 애초에 품고 있는 이상에 못 미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집회의 시위에 관한 법률이 있음에도, 실상은 잘 적용되지 못하고 있는 사례. 노동법을 교묘하게 피해서 노동자의 권익이 침해받고 있는 사례 등. 이러한 괴리감을 파헤쳐 보고 세상을 더 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철학이나 근본적인 공부를 하고 나면 세상에 대해 공부하게 되고, 사고력과 주장의 근거를 세울 줄 아는 능력을 얻을 것이라 기대했었다. 그 후 대학원을 가서 하고 싶은 전문적인 공부를 더 하든, 여러 방향을 고민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나이브하게 했었다. 근본적인 것에 대한 희망은 위의 이야기까지이다.
2학년 진입을 앞둔 시점, 현실적인 학과 선택의 배경엔 한 선배와 학점이 있었다. 철학과와 사회학과 둘 중 하나를 1지망으로 고민했는데, 지금도 친한 철학과 1년 선배가 철학이 얼마나 재밌는지 어떤 책들을 미리 보면 좋은지 등을 친절히 알려주며 철학과 선택을 추천해 줬고 흥미가 돋았다. 또 1학년 때의 낮은 학점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인기 많은 사회학과 합격이 어려워 보인 점도 철학과를 1지망으로 택하게 된 현실적인 이유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좀 웃긴 건, 부모님께서 대학 2학년 등록금 고지서를 보시고 철학과 진학 사실을 처음 아시게 된 일이다. 고3 때 가정이 정신없던 시절이었고, 학과가 아닌 학부 단위로 등록금을 납부하였으니 적당히 문과 계열로 갔겠거니 생각을 하셨으리라. 또 점수 배치표 상으로 A대학의 경제학과(가 포함된 ㅇㅇ학부)나 B대학의 철학과(가 포함된 ㅁㅁ학부)로 지원할 거 같다고 한번 쓱 이야기했었던 것 때문이기도 하리라.
이 질문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굳이 '쓸모'를 왜 따져야 하냐고 묻진 않겠다. 철학/인문학에서 왜 쓸모를 찾냐고 화낼 사람들이 눈에 여럿 보인다. 어차피 경영학, 경제학, 공학과 같은 수준의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의미의 쓸모가 철학에는 없는 것은 맞다. 대신 잘 찾아보면 충분히 쓸만한 데는 있는 게 철학이다. 우선 철학과를 선택하기 전에 원했던 쓸모와 철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이후에 알게 된 쓸모를 나눌 필요가 있겠다.
1) 사고력과 글빨/말빨을 얻었다
사고력과 말빨/글빨을 키우고 싶었다. 고교 시절 면접 시뮬레이션을 하며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데 글자 그대로 머리가 새하얗게 되고 입 한번 벙긋 못해본 일로 충격을 받았었다. 아무리 객관식 시험 문제 잘 풀어봐야 뭐 하나 생각이 들었었다.
이제는 내 주장과 근거를 조리 있게 정리할 사고력을 평균 이상 수준으로 갖췄다고 생각한다. 글빨도 생겨서 글 쓰는데 두려움이 없고, 브런치 작가도 되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또 말빨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왔다고 자신한다.
모든 철학과 졸업생이 다 잘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충실히 학과 공부를 했다면 발전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전공 수업 내내 읽고 쓰고, 말한다. 술 마시고도 철학 이야기를 많이 한다. 술에 취해서도 내가 시작했던 이야기를 잊지 않고 끝맺음을 내기 위해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이를 바탕으로 어떤 자리에서든 나를 표현하고 이야기하는데 어려움이 없어졌다는 것은 어떤 자격증이나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아니지만, 사회인으로서 기본이 되는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고 본다.
2) 인생의 근본적인 해답은 못 얻었지만, 그 해답이 필요 없어졌다
막연하게 철학과에 가면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견해를 갖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에 해답이 없어도 상관 없어졌다.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해결'이 아닌 '해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건(해결) 아니지만 질문이 필요 없게(해소) 된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한다. 내 공부가 짧아서 인지는 몰라도 철학에서는 어느 하나 시원하게 결론이 나는 게 없다. 그래서 그냥 답을 얻지 않기로 했다. 어떤 한 입장이나 대답도 반박될 수 있고, 또 새롭게 주장될 수 있는 것이므로 내 삶도 어느 하나로 고정 시키지 말고 계속해서 살아가며 하나씩 하나씩 삶에 대한 시각을 넓혀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1) 삶의 만족도 상승
내가 사는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확실하다. 물론 남이 보기에 맞는 삶의 방식은 아니다. 그렇지만 합리화는 가능하여 나에겐 맞다고 확신한다. 내 삶을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철학에는 다양한 입장이 가능하다. 어느 하나의 정답이 없다. 그렇다면 내 삶도 정답이 아니지만, 동시에 오답일 필요도 없다. 열심히 내 입장을 옹호하고 강화해 나가면 된다. 대신에 나와 다른 것에 대해, 내 입장에 대한 비판에 대해 폐쇄적인 태도만 갖지 않도록 경계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긍정하고 합리화할 수 있게 되니 어떤 선택을 하든, 무엇을 하든 결정이 쉬워졌고 후회가 없어졌다. 그래서 자기 효능감, 자기 통제감이 높아졌고 이로부터 삶에 대한 만족감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부한다.
2) 아이덴티티
브런치 작가가 되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 많이들 철학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철학 전공자를 주위 사회 생활하면서 직접 보기는 어렵다. 인문학 중에서도 가장 '돈이 안되기 때문에' 학과 정원도 대체로 적다. 특히나 금융권에 근무하다 보니 만 10년 동안 철학과를 본 전공으로 하는 사람 1명,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으로 했던 사람 2~3명 봤을 뿐이다.
철학과 전공자는 희귀하다. 왠지 서류가 합격된 이유가 철학과 학생이 궁금해서 얼굴이나 보려고 부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당연히 탈락했다. C레벨들은 언제나 인문학을 ‘사랑’하는 점이 작용했으리라.
그러다 보니 사람을 새로 만나거나, 화제를 꺼낼 때, 또는 자기소개를 할 때 학과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올리게 되고 사람들에게 인상을 각인시키는 데 도움 되는 경우가 많다. 흔한 경영학과 졸업생보다 희소한 철학과 졸업생이 인상을 남기는 데는 더 효과적이다. 경영학과보다 더 쓸모 있는 철학과!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게 낫다.
3) 배우려는 힘
네 자신을 알라,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라는 말이 있다. 철학 공부를 하며 머리는 샤프해진 것 같은데 어떤 지식이 남거나 쌓인 느낌은 적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뭘 새로 하려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해왔다. 취직 후에도 배울 게 투성이라 그냥 공부하는 게 디폴트였다.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더 열심히 자격증도 따고, 자기 계발도 열심히 하여 신입직원으로는 통계학과생만 뽑는다는 부서에도 자원하고 이동도 할 수 있었다.
읽고 쓰고 이야기하기. 철학과에서 계속하던 거 그대로 그냥 하는 거다. 그리고 그 행위가 그냥 취미가 되어 버려서 어떤 내용을 채울 지만 고민하면 될 뿐이다. 어떤 내용을 읽고 쓰고 이야기할지를 정하는 건 100% 자의에 의하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상으로 철학도의 자기 합리화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