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무용론자에서 예찬론자로 바뀌게 된 이유
한때 (수험 목적 이외에는 소설을 아예 읽어 보지 않았던 시절) 친구에게 소설을 왜 읽느냐고 물었다.
"사랑한다고 한 문장이면 될 걸, 왜 몇 백 페이지로 쓰는지 모르겠어."
이 글은 위 생각에 대한 반성문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이제는 소설 예찬론자가 되어버렸다.
소설을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예찬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 가장 인간적인 무엇
한 소설에 빠져 들었다가 잠깐 현실로 눈을 돌리는 순간 (밥을 먹으러 간다거나 등등), 매번 깜짝 놀란다. '아니, 이 글은 현실에 없는 완전 구라잖아. 어떻게 구라를 이렇게까지 자세하고 길게 쓸 수가 있지?' 소설에는 다양한 등장인물, 사건, 심리 묘사 등이 등장하고 내용들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가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없었던 것을 창조해 낸 소설가의 결과물을 보고 있으면 감탄하게 된다. 인간 능력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넓히고, 없었던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한 인간 능력의 한 측면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은 '인간'으로서가 아닌 '도구'로서 인간의 능력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쓰임을 위한 목적은 그 자체 목적이 되는 행동과는 다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게 아닌 인간과 삶 자체를 고양시키는 유희와 즐거움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증거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2. 다양한 삶을 엿보는 통로
인생은 짧다고 한다. 인생이 길다고 해도 한 사람에게서 다양한 삶을 생각해 낼 수 있을까? 그런데 소설과 함께라면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도 다양한 삶을 겪어낼 수 있다고 본다. 소설마다, 또 소설 안에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이 있기 때문에 다양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양한 것은 왜 좋을까?
1) 내 삶만 혼란스럽지 않다는 위안
자기 인생에 대해 100% 확신으로 의심 없이 살기는 어렵다. 과거에 대해서는 후회되기 마련이고, 미래의 시간은 계속 다가오는 상황 속에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마치 나만 겪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생각은 나에 대한 것만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심층적이고 전방위적인 측면에서 접하게 된다. 그리고 대개 소설 속 인물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이는 것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이런 것들을 보면 내 삶만 혼란스럽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어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소설 속 인물은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서 위안이 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앞서 소설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완전한' 무라기 보다는 소설가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소설가의 경험이 그대로 소설 속 인물의 경험과 같지는 않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혼란스러움, 불안함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내비게이션
소설마다, 인물마다 처한 상황과 거기에 대응하는 형태는 굉장히 다양하다. 전형적인 서사의 흐름을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르다. 극복을 해내거나, 피하거나, 도망치거나, 도움을 받거나, 알고 보니 문제가 아니었거나, 꿈속의 일이었든지 등등. 다양한 대응 형태를 보면서 내 삶에 벌어지는 문제에도 대응할 힘과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대응하든지 간에 소설은 잘 결론 났다. 또 소설을 다 읽고 나더라도 독자로서의 우리의 삶을 계속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삶은 계속될 테니 걱정 말고 차근차근 밟아 나가봤으면 한다.
3. 재미
소설은 그 자체로 재미있다. 요즘 OTT를 많이 보는데 그래도 깊은 재미는 소설에서 더 느끼게 된다. 인물의 외모를 내 마음대로 상상해보기도 하고, 공간과 시간, 냄새를 내 나름대로 재구성해보기도 한다. 종종 소설이 영화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원작보다 나은 영화를 들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상상의 스케일이 훨씬 크고 풍부하나 스크린에 구현되는 모습은 일부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영화가 영화로서의 퀄리티가 훌륭하거나 재밌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원작과 영화를 비교할 때 원작보다 영화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한번 추천을 부탁하고 싶다.
최근 여러 사람들과 독서에 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 소설 읽는 것은 '독서'가 아니라는 뉘앙스의 말이 있었다. 아마 소설은 단순 오락거리에 불과하며 유용성이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이지 않았을까. 유희를 즐기는 게 뭐 어때서. 이 글을 보며 누군가는 너무 그래도 소설만 읽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소설을 예찬한다고 해서 비소설(자기 계발, 경제경영 서적 등)을 읽지 않는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짚어주고 싶다. 직장 생활하다 보니 주기적으로 소설이 아닌 다양한 책을 찾아 읽게 되고, 또 실제 도움이 많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