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자식에 대한 바람과 기대는, 자식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날이 너무 좋다. 동네 천변 산책로뿐만 아니라 세상천지가 연분홍 벚꽃으로 물들어 다들 들떠 있다. 자동차와 아파트 마저 웃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우리 세 가족도 점심을 먹고 벚꽃 구경하러 호수 공원에 가기로 했었다.
점심 먹는데 아이가 졸리다며 투정을 부리더니 몇 숟가락 뜨지도 못하고 낮잠을 자러 가 버렸다.
아들 때문에 이 좋은 날 벚꽃 구경엘 못 갔다.
나 가 고 싶 다.
실은 아침에 동네 도서관에 다녀오며 아들에게 활짝 핀 벚꽃 이쁘지 않냐고 물었었는데, 안 이쁘다고 빨리 놀이터 가고 싶다고 답하긴 했었다. 복선이 이미 깔려 있었다. 떡밥 회수 완료.
난 가고 싶은데 아들은 이미 가기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고 싶으니 아들도 가고 싶어 해야 한다고, 나의 바람을 아들에게 떠넘겼었다. 그러고 나서 벚꽃 구경을 못 나가게 되니 자러 가버린 아들 때문에 못 갔다고 짜증이 나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글을 써본다.
그런데 아들의 낮잠을 말려서라도 데리고 나가야 했을까? 벚꽃 구경이 아들에게 도움이 되는 거라고 어르고 달래면서? 아직 한국 나이로 6살이 되었을 뿐이다. 아서라.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서 부모의 기대가 자식에게 전가되는 경우는 너무 자주 본다.
예를 들어,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들을 혼내다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는 장면은 쉽게 상상된다.
"내가 다 나 잘되라고 그러는 건 줄 알아?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아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것만 5분만 더 하고 공부하려고 했는데, 에잇! 몰라, 하기 싫어!'
점점 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가고 말 것이다. 자식에게 통제권을 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래도 올바른 길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부모가 자식을 평생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해도 문제지만, 우선 그건 불가능하다. 대체로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죽기 때문에 말 그대로 자식 삶의 '평생' 할 수도 없다. 부모가 죽고 나서 자식은 본인의 통제권도 없이 살았을 텐데 삶의 중요한 결정들을 스스로 행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부모로서 적절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조금 더 자식을 지켜봐도 좋지 않을까? 설득을 통해 가이드를 제시하되, 바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답답해하고 화내지 말도록 하자.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다.)
부모-자식 관계뿐만 아니라 성인들 상호 간에도 이런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내 바람과 기대를 타인에게 투사하여, 타인이 이미 나처럼 생각하고 행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나 혼자만의 기대가 크면 내가 느끼는 실망만 큰 법. 나의 욕구를 정확히 인식을 하고, 타인에게는 설득을 하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을 수행하면 될 터이다. 내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나의 욕구를 가지고서, 네가 그럴 것이라고 여긴 채로 행동한다면 관계를 그르치고 말지 모른다.
글을 쓰고 나도 아들은 낮잠에서 깨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