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더레코드의 기록 by 이태경 선생님
[온더레코드의 기록]은 온더레코드에 있는 많은 기록들 중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의 칼럼이 될 수도 있고, 언젠가의 기사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기록이 새로운 배움의 영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천 양정여고에서 2014년부터 2017년 2월까지 진행된 ‘학교 안 예술학교 - 말랑창작학교’의 기록 중 하나입니다. 이태경 선생님은 “ 딱딱한 학교에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학생 자신을 위한, 고유한 자신을 관찰하고 표현하기 위한 교육’을 위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서 프로젝트를 마치며 쓰신 글을 두 번에 걸쳐 소개합니다.
2016년 '학교 안 예술학교'에는 저 역시 수강생으로 드로잉 아뜰리에와 영상 아뜰리에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동안 밖에서 운영자로서만 지켜보면서 저도 안으로 들어가 예술을 누려보고 표현해보고 싶은 욕망이 날로 커져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드로잉 아뜰리에에 참여한 학생들은 예술학교의 시작과 끝을 '낙서'로 재미있는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두 번의 낙서를 해보며 느낀 것은 무엇보다 '환경'의 중요성이었는데요. 이 두번의 경험과 시간들이 한 학기 동안 드로잉 아뜰리에를 통해 경험하고 통찰 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의 중심에 놓여있던 것 같아서, 이번 장에서는 첫 번째로 가졌던 낙서 수업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예술학교에 입학해서 가진 첫 시간은 모든 과목의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진행하는 공통 수업이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파티라고 이름이 붙여져있었는데, 실제로 그 수업이 끝난 후 그 시간을 수업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색다른 방법으로 신나게 낙서하며 놀았다는 느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부제는 '라스코 동굴을 거닐며' 였습니다. 먼저 드로잉 선생님이 켄트지 4~5개를 이어 붙인 거대한 캔버스에 자유롭게 선을 그으며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시며 모두의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동굴 내부의 길을 그린 커다란 지도를 한 장 보여주시며 안내를 해주셨어요.
'지금부터 우리는 인류 최초로 동굴에 그림을 그려보게 된 원시인이다. 기존에 그림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고, 인류 최초로 그리는 것이기에 잘 그리지 못하더라도 이는 당연한 것이고, 무엇을 그려도 상관이 없다. 심지어 깜깜한 동굴이어서 남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서 우리가 하나씩 건네 받은 것은 목탄이었습니다. 구석기 시대에 마커나 붓같은 것은 없었을 테니까요. 목탄을 그리기 도구로 사용한 건 개인적으로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손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새까만 그을음이 손에 묻어났어요. 그리고 굉장히 가벼워서 조금만 세게 잡으면 부러질 것 같은 느낌도 들었구요.
우리는 곧 목탄 하나씩을 손에 쥔 채 강당 뒤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섰습니다. 강당 뒷 편은 불을 모두 꺼놓아서 정말 어두운 동굴 입구에 서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하나, 둘, 셋!"하는 신호와 함께 모두가 학교 안에 생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깜깜한 동굴에 중간 중간에 촛불이 간간이 놓여있어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강당 뒷편에는 무대로 드나들 수 있는 좁고 긴 복도가 무대 뒤를 회랑처럼 둘러싸고 있고(아래그림 A), 지하실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이어져 있습니다. 어둡기 때문에 계단 같이 조심해야하는 곳에는 공사장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깜박이 경고 등도 놓여있었어요. 계단을 따라 돌아 내려가면 정면과 양 옆으로 높다란 벽을 마주하게 됩니다.(아래 그림 B) 이 모든 곳의 벽에 캔버스가 줄줄이 이어져 거대하고 기다란 그림판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캔트지 200장을 준비해오셔서 점심부터 선생님들이 동굴을 제작하셨다고 합니다.)
인류 최초로 그림을 그리는 원시인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제한은 없었습니다. 신나게 무언가를 낙서하고 난 뒤에는 낙서가 되어있지 않은 벽을 찾아서 동굴을 '거닐며' 신나게 저마다의 무엇을 분출해내었습니다. 내게 그림이란 초등학교, 중학교 때 평가받기 위해 혹은 과제로 어쩔수 없이 그려야 했던 경험으로 남아있지만, 이 곳에서 내가 무언가를 신나게 그리는 순간들은 그런 경험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즐겁고, 유쾌하고, 색다름을 느낄 수 있고 주위의 시선에 상관없이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는 순간을 누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예정된 첫 번째 수업 시간이 끝났지만 시간을 더 달라는 학생들의 요구에 충분히 동굴 벽화를 그리는 시간을 갖고 모두 밖에 나왔습니다. 밖에서는 먼저 벽화 작업을 끝낸 학생들이 새까매진 손을 서로 밪대로 웃기도 하고, 기념으로 사진도 찍고 있었어요. 또 몇 명의 학생들은 동굴벽화를 시작하기 전 선생님이 퍼포먼스를 하며 그렸던 선 위에 자신의 낙서를 더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크릴 물감을 찍하고 짜내어 손으로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손으로 선을 긋기도 하고, 문지르거나, 뿌리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표현하였어요.
모든 아이들이 동굴에서 나오고, 짧은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표현을 통해 얻는 자기 경험과 통찰'이란 주제였습니다. 제목만으로도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을 다루는 것 같지만, 동굴 벽화를 만들고 나온 사람이라면 이미 그 어려움이 반감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연을 통해 들은 모든 말들이 한 구절 한구절 내게 깊숙히 다가왔지만 그 중에서도 두가지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잘한다 못한다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그리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첫 번째는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 나는 그림을 잘 못그린다.'라는 프레임을 부수고 '그림 그리고 싶어''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잘한다 못한다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그리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아이들과 매일 수업을 하는 교사로서 정말 강렬한 영감을 주는 부분이었습니다. 수업의 커리큘럼과 내용, 평가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준비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학생이 이것을 배우리글 원하는가'로부터 출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라스코 동굴을 거닐며'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주는 것 같았어요. 오늘 우리는 표현을 통해 얻는 자기 경험과 통찰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환경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내가 원해서 그림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충분한 자기 관찰과 표현을 통해서 타인도 발견하고 공감 할 수 있게 되며, 내 느낌 내 생각 내 감정을 소중히 하는 것은 자존감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모든 예술가는 '용기있게 자신(과 세계)를 존중한 사람들'이며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이유는 고유성에 있다'는 것인데요. 예술을 누리는 것이 자기 관찰과 표현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한 충분한 자기 경험은 공감능력과 자기 존중을 두텁게 한다는 것. 그리고 저마다의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는 통찰은 인상깊었습니다.
용기있게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예술가는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용기있게 모험하는 혁신가들과
많은 면에서 맞닿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용기있게 자신(과 세계)을 존중할 수 있는 예술가'는 '더 나은 자신(과 세계)를 위해 용기있게 모험하는 혁신가'들과 많은 면에서 맞닿아 있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보게 하였습니다. 자기를 존중할 수 있어야 타인을 존중할 수 있고, 내가 나에 대해 알 수 있어야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데 예술은 풍부한 자기 경험을 통해서 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인류 최초의 '위대한 낙서'만들기는 누리는 예술에 대한 호기심을 안겨주며 '학교 안 예술학교'의 시작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장 즐겁게 그림을 그렸던 순간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온더레코드의 기록] 주머니의 연필, 위대한 낙서 by 이태경 선생님 끝.
학교 안 예술학교의 2016년 기록을 더 살펴 보고 싶다면, https://www.facebook.com/2016feelsogood/
학교 안 예술학교의 2015년 기록을 더 살펴 보고 싶다면, https://www.facebook.com/groups/interschoolart/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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