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3. 곡우] 은사시나무_꽃을 보려면

by 은사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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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탐구생활레터 쇼얼

함께 헤엄치며 서로를 키우는, 육추의 계절 이야기


vol. 3 곡우. 꽃을 보려면


손발이 뜨거운 나는 추위보다는 더위에 약했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남보다 배는 흘리는 땀에 늘 괴로웠다. 학창 시절에는 단체로 벌을 서다 땀을 뚝뚝 흘리는 바람에 열외가 되기도 했고, 가벼운 산책에도 겨드랑이와 등을 적시는 땀에 회색 티는 금세 ‘투톤’ 셔츠가 된다.


10년 전 항진증이 생겼을 땐 이 뜨거움은 더욱 타올랐다. 일명 화병이라는 갑상선 항진증은 한겨울에도 땀이 줄줄 흐른다. 배출되는 화가 몸 구멍에선 땀, 눈물, 찌르는 말 등으로 바뀌었다. 종일 머문 직장에선 드러낼 수 없으니 꾹 참다 집에 와서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열불이 나서’ 몸과 정신이 타니 살이 저절로 빠졌다. 항진은 심장도 머리도 살도 타는 듯한 병 같다. 내 화는 안압도 높여 근육도 팽창했는데 몇 년은 눈이 돌출되어 있었고 다시 가라앉았을 땐 눈 밑 꺼짐을 얻었다. 다행히, 당장 약을 복용하라는 의사 덕에 항진증은 차츰 나아졌다(지금은 장기 약 복용으로 저하와 항진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말을 참았던 어린 시절에는 뻗치는 화를 급랭하여 간직했다. 편안하고 따뜻해 보인다는 인상 아래, 차갑게 얼려둔 감정들을 꾹꾹 눌러두고 살았다. 그 감정들이 내 전부인 것만 같던 젊은 날들. 뻔히 태워질 걸 알면서도 불 속에 다가서는 불나방처럼 살았다. 아이를 낳고 나의 화는 꽃 ‘화’로 개화되는 듯했으나, 가끔 세찬 비가 오고 태풍이 불면 무장 해제되어 타인이 아닌 나를 자주 괴롭혔다. 그렇게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는 시간이 흘러갔다.



이제 오십이 된 나는 종종 새벽에 잠이 깬다. 목뒤로부터 올라오는 열감. 춥다며 꼭 덮었다가 등이 뜨거워져서 일어난다. 몸을 돌려 발 쪽으로 누었다가 그래도 잠이 안 오면 잠시 앉는다. 지난주에는 손가락 마디가 시큰거렸고 옆구리나 등에 담도 자주 결린다. 자다가 쥐가 나 다리를 쭉 펴기 시작했고 목소리는 더 낮고 굵어졌다. 그러나 몸이 피어나기 시작한 또 다른 화는 이전과는 다르다. 몇 해 전부터 유한한 삶이 진지하게 다가오더니 몸과 마음이 제대로 깨어 있을 시간이 부쩍 짧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손에 잡힌 책들은 삶, 죽음, 돌봄, 생을 바라보는 소설, 시, 수필, 다큐 등이었다. 자연스럽게 변하는 몸과 그에 따른 마음이 살필 시간이 되었다. 새로운 나를 맞이하기 위해 새로운 이들과 낯선 작업을 시작했다. 피쉬 – 엄마들의 글쓰기 모임은 묵은 흙을 털고 새 흙을 붓는 ‘갈이’의 계기가 되었다(모든 게 생소한 경험들이다).


이 글을 쓸 무렵 절기는 곡우이다. 곡우 무렵에는 온도가 올라 땅속에 머물던 물이 올라온다. 땅 위로 올라온 기운은 따뜻함과 뒤섞여 하늘로 오르고 아래로도 퍼진다. 이 활발한 기운, 때론 서늘하게 때로 따뜻하게 부는 봄바람에 하늘과 땅이 서로 큰 것을 뒤섞일 때 씨앗은 비로소 싹을 틔운다. 농부들은 예로부터 간절하게 씨앗 비를 바라며 기도하였고 날마다 절제하며 한 해 농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해마다 돌아오는 봄이건만 올해 봄에 그야말로 열불이 날 상황들을 마주할 때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적당히 여유롭고 좀 더 편안해졌다. 내 속에 남아있던 찬 기운들이 조금씩 풀어졌다. 일을 펼칠 때는 시작과 마침이 눈에 보이기도 하고 만나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좀 더 관대해졌다.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지 설명하는 것도 좀 더 당당하고 자신 있게, 뻔뻔하게 말하기 시작했다(듣던 지 말든지 하는 마음도 있다, 어차피 들을 사람만 듣겠지.).

그리고 비로소 정호승 시인의 ‘꽃을 보려면’ 시어가 읽히는 것이다.



꽃을 보려면 / 정호승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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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숲모임에서 둥글레는 자기 모양대로 속도대로 피어나는 꽃을 말해줍니다.

찬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아지랑이가 핀다고 하는 걸까. 이런 저런 궁금증이 생기는 올해 봄은

내 안의 차 있던 화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내 나이 50.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열이 오르고 뚝딱 거리는 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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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시나무

23년 차 치료실 교사입니다. 곰렉씨, 화파와 순복이 두 딸과 걷고 노는 게 여전히 재밌어요.

곡우. 적당한 온기로 덮인 땅에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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