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나는 크리스마스의 은총을 두 번 받은 셈이다. 한국에서 한 번, 모스크바에서 한 번!
러시아정교회의 성탄절은 1월 7일 이었다. 웬걸 정말 뜻밖의 선물이었다.
화려한 건물들과 붉게 물든 성탄 장식들. 그 보다 더욱 빛이 났던 건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부대낀 시간들이었다.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머금고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날 밤을 보냈다.
드디어 모스크바를 떠나는 아침! 따뜻한 행운이 연이어져 있던 날들을 회상하며 짐을 꾸렸다.
(그런데 러시아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프라하로 떠나는 날 숙소에 부탁해 공항에 가는 택시를 예약했다.
공항으로 가는 그 택시 안에서 ‘문제의 터키남’를 만났다. 빙판길을 운전하며 뒷 좌석에 앉은 나에게 끊임없이 뻐꾸기를 날리던 그.
역시 난 해외에서 통하는 것인가?!! 그는 운전하면서 뒷 좌석에 앉은 나에게 유튜브에 올린 자신의 노래솜씨를 자랑하기 바빴다. 그의 꿈은 가수였다. 가수가 되기 위해 러시아에서 돈을 벌고 있다고. 노래솜씨와 무대매너가 나쁘지 않다고 호응을 해주었다. 터키 노래 풍은 도무지 와 닿지 않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나 싶더니 갑자기 급정거를 하는 게 아닌가!! 박력 있는 핸들링이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모르는 그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말자! 나의 목적지인 공항에 제 시간에 안착하는 게 그 당시 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급정거를 하고 잠시만 기다리라는 콩글리시만 남긴 채로 그는 어딘가로 급히 사라져버렸다.
택시에서 나간 지 10분이 되어 가자 영문을 모른 체 불안해졌다. 똥을 누러 간 건지 러시아 갱들을 데리러 간 건지 모를 노릇이다. 남은 여행 경비를 넣은 복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여러 상황들을 예측했다. 여기서 내려서 다른 택시를 타자니 너무 외진 곳이다. 히치하이킹을 할지 내가 택시를 운전해서라도 공항에 가야하는 지 막막할 찰라 그가 나타났다.
나의 상상의 나래와 다르게 다행히 혼자 달려온다.
한 손엔 머리만한 시뻘건 장미와 다른 한 손엔 알룐카 초콜릿을 여러 개 들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했다.
그가 나에게 프로포즈를 한 것이다.
러시아 국제공항으로 가는 낡은 택시 안에서. 언 땅을 미끄러지듯 달려와 한다는 말이 자기와 결혼 해달라고. 같이 한국에 가서 뜨겁게 살고 싶다고.
자신은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들끓는 마음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부터 낯 뜨거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내 마음에서 짧은 신음을 내뱉는다. ‘뜨악~’이라고. 이토록 당황스럽고 웃겨서 환장할 노릇인 마음을 가까스로 차갑게 진정시키고 왜 나에게 이러냐고 물었다. 내가 이 아침에 무슨 잘못이라도 했냔 말이다. 그가 흥분하며 말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을 본 적이 없다고, 이건 운명이다’라고 가쁜 숨을 내뱉는 그이다. 시뻘건 거짓말에 기가 차면서도 잠시 기분은 좋았지만 그의 흑심을 나름 재단하고 있었다. 그는 키르키스탄에서 살았던 국적은 터키인 현재 러시아에 살고 있는 국외 노동자였다. 한국에 오고 싶다는 거다. 나와 결혼을 해야 시민권을 얻어 한국에서 돈을 벌고 살 수 있는 것이다. (혹시 한국 아이돌을 꿈꾸는 건가??) 짱구에서 계산이 돌아가지만 나에게 이토록 달콤하고 기가차는 프로포즈는 처음이다.
택시를 주차해놓고 내가 프라하 비행기를 탈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나섰다.
한사코 마다한 택시비를 뒤에 던지고 내렸더니, 무려 내가 준 택시비로 달콤한 케익까지 사준 그다.
그리고 나의 최종 여행 종착지인 터키에서 2주 후에 만나자고한다.
뜨거운 포옹과 함께. (정확히 2주 후 왓츠 앱을 통해 정말로 연락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공항에서 그 많은 인파 속에서 피아노 앱을 이용해 한 손으로 연주를 하며 나만을 위한 달콤한 세레나데를 불러주었다. 완벽한 하루였다.
그의 흑심어린 달콤함 덕분에 프라하로 가는 기내 안에서 차창을 마주하고 실소를 내뿜는 내 자신을 바라보자니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하였다.
정확히 2주 후 난 프라하를 거쳐 터키 카파도키아 여행까지 마치고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친한 동생 은희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 함께한 여행이었다. 그 날 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끊임없이 왔다. 당신과 함께 할 멋진 숙소를 예약했으니 자기와 시간을 보내자고.(무슨 의미?)
가끔씩 여행 중 안부를 물을 때는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진짜로 같은 도시에서 연락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한 끼 식사를 같이 하자는 게 아니라 같이 밤을 보내자는 거다. 두려웠다.
끈적이는 관계에 겁이 많은 나는 그저 휴머니즘적인 관계구도를 원한단 말이다.
겁쟁이 소심모드로 변환되어 난 동행이 있으니 안 된다고 하였다.
담백하지 않은 그의 연락을 도망 다녔다. 대충 다독이며 거절하여도 끈질겼다.
그 찰라가 진심이었을까. 진심을 가장한 큰 집념이었을까.
그 무엇이라도 받아들을 사이즈는 아니었다. 당혹스러움을 간신히 누르며 그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여 미안하다고 했다. 그 당시 나의 모드는 러시아인들에게 받은 과분한 친절로 한껏 선해진 상태. 나도 다른 이에게 차갑고 모질지 말아야지 다짐하던 몰랑몰랑한 질감의 마음이었다. 그에게 차마 본래 내 성격대로 하지 못한 게 낭패였나.
그 뒤로도 끈질기게 오는 연락을 어찌어찌 다독여서 고이 보내드렸다.
서로의 생에 행운을 빌어주며!
어디든 폭 빠지지 않아서 안전한 건지, 폭 빠져봐야 더 폭이 넓어지는 경험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떤 때에는 직감대로 움직인 내 소심함이 나의 보디가드 일 수도.
잠깐의 헤프닝으로 서로에게 안전한 추억을 선사한 그 날을 떠올려 본다. 이 또한 고마운 여행의 기억일지니. 무담시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의 안녕을 빌어본다. 생의 작은 토막의 틈에 잠시라도 들어와 안착하는 것 또한 큰 인연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