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깡패 같은 아빠

by 정연주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느닷없이 가훈을 써서 내라고 했다. 가훈이 있을 리가… 저녁에 식구들이 모여 앉아 가훈을 정했다. 아빠는 ‘나부터 잘하자’라고 말했지만, 가정통신문에는 ‘스스로 잘하자’라고 적었다. 가훈이 일종의 우리집이 지향하는 삶의 기조라면, 내가 아빠에게 배운 가르침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가훈을 써내고 한 달 후엔가, 반 남자아이와 싸우고 집에 울면서 왔을 때, 아빠는 내일 가서 손수건에 돌멩이를 넣어 그 아이에게 던지라고 했다. 가훈이 반드시 윤리적일 필요가 있을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빠는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성당에서 경비와 청소부 일을 하며 가족들을 건사했지만, 이십 대 초반까지는 원주에서 깡패로 살았다고 한다. 딱히 그 시절을 딸들에게 말하지 않았어도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때 새겼을 것이 분명한 아빠 팔의 문신. 조악한 하트 주변에 사랑, 평화가 검은 문신으로 박혀 있었다. 게다가 아빠는 화가 나면 영 참지를 못했다. 상을 엎는 것은 기본이고 손에 잡히는 것은 뭐든 집어 던졌다. 한번은 목침을 던져 형광등을 깨트린 적도 있었다. 소리와 반짝하는 시각적 충격 때문에 아직도 그 장면이 선명하다.


아빠는 다행히 집에서는 그 누구도 때리지 않았다. 엄마의 말을 들어보면 밖에서는 시비가 종종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빠는 일주일에 딱 하루 휴일이었는데 아침 일찍 성당 밖을 나가 하루 종일 보내다 오곤 했다. 매번 술에 취해 들어오셨는데, 자정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날 대부분은 파출소에 있었던 듯싶다. 이미 전과도 있던 아빠는 구속 위험이 컸지만, 성당 신부님들의 신원 보증 덕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평소의 아빠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기분이 좋아도 웃기만 할 뿐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딸들이 울고 있으면 늘 싸우는 방법을 알려주곤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넘기면, 사람들이 착하다고 할 줄 알지? 아니 무시한다. 똑같이 되갚아줄 방법을 찾아라”라고 말해주셨다. 나는 아빠의 그런 말이 좋았다. “싸울 때는 왼손으로 머리를 잡아라, 상대가 오른손잡이면 팔로 방어도 하고 오른손으로 공격도 같이 할 수 있다.” 이런 노하우. 아빠의 사랑은 방학이 끝날 무렵 만들기 숙제를 대신해주는 것이기도 했고, 등교할 때 신는 구두를 매일 닦아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남자 친구 때문에 화가 난 딸에게는 “아빠가 얼굴만 빼고 묻어줄까”하는 말을 건네는 것도 아빠만의 사랑이었다.


아빠가 휴일 또는 집에서 만취해서 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엄마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었겠지만, 나는 그런 야생성을 지닌 아빠가 내 뒤에 있다는 것이 든든했다. 한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지만 맘에 안드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든 땅에 묻어버릴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스무살이 되는 나에게 아빠는 직접 만든 작은 칼을 선물해주기도 했었다. 이유는 떠오르지 않지만 그맘 때 밥상머리에서 울면서 “요즘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라고 아빠에게 소리친 기억이 있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도 가끔 그 엉성한 칼을 왜 내 손에 쥐어 줬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소중한 것들을 담아두는 박스에 넣어둘 것을 이미 알았던 것일까.


문지방 밖이 곧 일터였던 성당 안에서, 아빠는 동물원에 갇힌 야생 동물 같기도 했다. 성당 안에서 온갖 허드렛 일을 다하고 삶이 전시되면서 종을 보존하는 동물 말이다. 아빠는 육체 노동을 하는 남자들 특유의 마른 체격이었는데 겨울에는 비슷한 컬러의 목폴라 니트를, 여름에는 셔츠를 단정히 입고 일했다. 아빠는 비질을 하면서도 신도들을 의식하거나 성당 안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성당 안에서 돈을 받고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신도들 중 몇은 태도가 나쁘다는 식의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새로오는 신부님들 중에서도 뻣뻣한 아빠를 못마땅해 하는 분들이 생겨났다. 아빠의 나이가 쉰에 가까워지면서 아빠보다 어린 주임 신부님이 아빠가 하는 일에 잔소리를 하는 일도 생기기 시작했다. 아빠는 그동안 자연의 이치처럼 고통을 감내하며 짧은 행복의 순간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새로운 고통은 아빠가 지키고자 했던 중요한 것을 잃게 했을 것이다. 쉰 살이 된 나는 성실히 최선을 다해 살아도 체면을 잃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빠의 만 51세 생일 무렵에 아빠는 위암 4기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그 후에도 아빠는 성당 일을 멈추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서야 병원에 입원을 했고, 성당 사택에서 임종했다. 집이자 성당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빈소를 차린 지 얼마 안되어 우체부가 도착했다. 조의금 배달인줄 알았는데 “그동안 너무 고마웠었다”며 직접 조문하러 오신 것이었다. 우체부 뿐이 아니었다. 꽤 많은 뜻밖의 분들이 빈소를 찾았다.


장례가 끝난 후 아빠가 남긴 노트를 보았다. 아빠는 낮은 학력에 비해 손글씨를 꽤 잘썼는데 인쇄 활자처럼 글씨들이 가지런하게 쓰여 있었다.


1998. 8. 3

성가대실 뒷문 쪽 샤시 틀어짐 금요일 전까지 고칠 것

남자 화장실 변기 고장 수리비 15,000원

타일에 껌이 남아있다고 프란치스코 신부가 말함.

연희연주와 오랜만에 저녁에 같이 회를 먹음.


언니와 나는 장례를 치르며 그다지 크게 울지 않았는데, 노트를 읽으며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그곳에는 아빠의 생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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