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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Nov 09. 2018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

30일 시필사

한 번은 쓰다듬고

한 번은 쓸려 간다


검은 모래 해변에 쓸려 온 흰 고래


내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지갑엔 고래의 향유가 흘러 있고 내가 지닌 가장 오래된 표정은 아무도 없는 해변의 녹슨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씹어 먹던 사과의 맛


방 안에 누워 그대가 내 머리칼들을 쓸어내려 주면 손가락 사이로 파도 소리가 난다 나는 그대의 손바닥에 가라앉는 고래의 표정, 숨 쉬는 법을 처음 배우는 머리카락들, 해변에 누워 있는데 내가 지닌 가장 쓸쓸한 지갑에서 부드러운 고래 두 마리 흘러나온다 감은 눈이 감은 눈으로 와 서로의 눈을 비빈다 서로의 해안을 열고 들어가 물거품을 일으킨다


어떤 적요는

누군가의 음모마저도 사랑하고 싶다


그 깊은 음모에도 내 입술은 닿아 있어

이번 생은 머리칼을 지갑에 나누어 가지지만

마중 나가는 일에는

질식하지 않기로  


해변으로 떠내려온 물색의 별자리가 휘고 있다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 」, 김경주, 『고래와 수증기 』


예전에 살았던 골목을 지나고 있다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불과 5-6년 전까지 그곳은 우리 두 사람의 아지트였다. 일이주에 한번은 친구집에 들러 머물다 오곤 했다. 가끔 주말에는 취하지 않은 민낯의 친구가 반겼다. 바람 부는 날에는 문을 열고 옥상에 널어둔 빨래를 나란히 앉아 바라보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호박을 넣어 칼국수를 끓여 먹고, 작은 상을 펴 책 한 권을 올리고는 함께 읽기도 했다.  


보증금 3천, 월세 15만원 짜리 8평 옥탑방은 언젠가 꺼내 먹으려고 넣어둔 사과가 가득한 톱밥 상자 같았다. 문을 열지 않고 "집 앞을 지나간다"며 친구에게 메시지만 보내는 날도 있었다. 이렇게 하나, 둘 아껴 먹는다 해도 언젠가 다 꺼내 먹는 날이 올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사과도, 상자도 없다. 그래도 나는 목마르고 지치는 어느 날, 문득 그때를 떠올린다. 며칠 전에는 그 친구를 만나 사과 주스를 마셨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얼굴을 확인했다. 친구의 고민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웃는 게 전부.


카페를 나서는 길, 친구의 풀어진 신발끈을 묶어 주었다.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좋았다. 이상하지, 어떤 마음은 후- 불어 날려도 가라앉는 먼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내머리카락에잠든물결 #김경주 #고래와수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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