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끝

30일 시필사

by 정연주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끝을 가지고 있다

끝은 날카롭지 않고 차갑지 않다

무겁지 않고 점점 부푼다

떠다니고 잠을 자기도 한다

끝을 잡으면 몸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기분

어디라도 흘러갈 수 있다

끝에 서면 아주 작은 깃털을 꺼내는 기분

반짝이며 날 수 있다

끝을 안으면 가슴이 생기는 기분

같이 살고 싶다

끝을 읽으면 시를 쓰는 밤들이 늘어나지

물랑물랑

끝내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녀의 끝」, 신영배,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모뉴먼트 밸리라는 게임을 한동안 했다. 게임 속 소녀는 기하학적인 공간에서 고요하게 이동한다. 큐브를 돌리듯 조작하다 보면 소녀는 앞으로 나아가고 또 다른 공간에 놓인다. 이 게임에서 끝은 없다. 그 소녀는 외롭다기 보다는 고독한 주인공. 깨트리고 싶은 못된 마음이 가끔 생기기도 하지만, 가끔 멍하니 꺼내보는 나만의 스노우볼.


물랑물랑하면 깊은 바다에 잠기는 기분이다. 떨어지는 불안감 없이, 숨막히는 초조함 없이 부드럽게 풀어지고 아늑하게 내려 앉는다. 부드러운 배가 오르락 내리락, 그 위로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5시의 낮잠같이. 깨고 나면 끝이 아니라, 기지개를 켜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녀의끝 #신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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