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30일 시필사

by 정연주

눈치는 보일 듯 말 듯 아주 작은 물고기

나는 배꼽이고 항문이고 눈에 띄지 않는 곳마다 눈치를 풀어 키웠다

물고기는 배고픈 내게 밥을 물어다주었고

때로 감쪽같이 숨는 법도 알려주었다

눈치 때문에 가까스로 불행을 벗어나는 일이 많았다

눈치를 보며, 눈치를 따라가는 게 익숙해질 무렵

나는 서서히 살이 올랐다

그러면서 몸속의 작은 물고기는 한 마리씩 죽어나갔다

하나같이 배가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다

눈치에겐 불안이 유일한 먹이였던 것,

나에게서 풍기기 시작한 비린내를 눈치채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눈치」, 길상호, 『우리의 죄는 야옹』



VIP가 끼는 회의 대부분이 눈치게임이다. VIP가 상정한 관점을 누가 맞추느냐로 회의가 귀결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나는 주로 눈치게임에 실패하는 편이다. 회의가 끝난 후 집에서 이불킥 하거나, 뜬금없는 소리로 VIP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갑작스런 질문으로 VIP를 환기시켜 담당자를 궁지에 몰아 넣는다. (의미없지만, 오늘 회의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에요.)


이 게임의 시작은 알면서도 묻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질문은 모르는 사람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진짜 고수는 알면서도 묻는다. 통하는 것이 있어야 친교도 깊어지고, 일도 늘어난다. 통하는 것이 없으면 친교고 뭐고, 벌칙에 당첨되고 일도 늘어난다. 언젠가는 멍하니 있는 스킬도 키울 수 있겠지. 하아....


볼까, 말까 하는 순간부터 눈치는 시작이다. 수평조직이에요, 강조하는 순간 결코 수평이지 않은 것처럼. 일단 나는 입사한 지 9개월 밖에 되지 않아서, 풀어 기르는 눈치가 몇 마리 되지 않지만 불안을 먹으며 무럭무럭 커가는 중이다.


#눈치 #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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