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지문

30일 시필사

by 정연주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어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바람의 지문」, 이은규, 『다정한 호칭』



실체가 없지만 잠시 머무는 존재들이 있다. 소리가 그렇고, 바람이 그렇고. 또 순식간에 사라지는 마음이 그렇다. 시인은 ‘바람’이라고 하는데, 자꾸 ‘마음’이라고 읽는다. 우리는 바람을 잡을 수 없지만, 바람은 무엇이든 잡을 수 있다. 바람에 사로 잡히면 스스로는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고 만다.


퇴근길 울었다.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고,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우는 나를 뒤따라 오던 아파트 입주민에게는 "알레르기에요."라고 핑계대고 싶었으나, 어쩌면 일찍 찾아온 갱년기인가 싶기도 해서 차라리 우는 걸로 했다. 어쨌든 지난 주부터 수상한 방향으로 불어대는 내 속의 바람들은, 나중에야 그 뜻을 읽어낼 수 있을까. 조금 늙고, 더 현명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참, 난 이 시의 두 번째 연을 좋아한다. 특히 이 문장.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바람의지문 #이은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탁구공